갈라진 이탈리아 국민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마멜리의 국가’ VIDEO: Riccardo Muti - Italian National Anthem/Inno di Mameli


갈라진 이탈리아 국민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마멜리의 국가’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정태남의 클래식 여행] 이탈리아/로마(Roma)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로 인하여 이탈리아에서 많은 감염자와 희생자들이 발생하자 이탈리아 정부는 전 국토에 걸쳐 격리조치를 취했다. 사람들은 집안에 갇혀 답답한 순간을 극복하기 위해 발코니에 나와서 다 같이 함께 노래를 부르곤 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나폴리의 노래인 ‘오 솔레 미오’를 많이 불렀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 솔레 미오’는 제목뿐 아니라 가사가 이탈리아 표준어가 아닌 나폴리 방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지방 사람들은 입에 담기 힘들어한다. 


이탈리아 국기가 휘날리는 빗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


게다가 북부 이탈리아 사람들은 남부 이탈리아를 깔보는 경향도 있다. 이처럼 이탈리아 사람들은 지역감정이 매우 강하지만 국가적인 위기 상황이 닥치면 통일된 모습을 보인다. 이때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는 <인노 디 마멜리(Inno di Mameli)>와 <바 펜시에로(Va’, pensiero)>다. 


<인노 디 마멜리>는 ‘마멜리의 국가’라는 뜻으로 현재 이탈리아의 국가(國歌)이다. 그런데 가사는 매우 애국적인데 반해, 행진곡풍의 곡조는 예술의 나라의 국가치고는 뭔가 많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준다. 반면에 ‘바 펜시에로’는 음악적 완성도가 매우 높기 때문에 세계의 웬만한 합창단은 이 곡을 정규 연주회 프로그램에 넣기도 한다. 이 노래는 보통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란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탈리아의 ‘숨겨진 제2의 국가’나 다름없다. 




이 두 개의 노래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통일을 강렬하게 염원하던 시대인 1840년대에 등장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이탈리아는 끊임없이 외세의 지배를 받아 왔고 교황권과 각 나라 사이에 서로 얽히고 설킨 갈등으로 시달려 왔다.


이렇듯 이탈리아가 갈기갈기 찢어져서 외세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 이탈리아 사람들은 사르데냐 왕국의 왕 빗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구심점으로 하는 이탈리아 통일을 염원했다. 사르데냐 왕국은 피에몬테 지방과 사르데냐 섬으로 이루어진 이탈리아인의 입헌군주국이었다.(참고로, 이탈리아어 표기에서 겹친 자음은 모두 또박또박 발음하기 때문에 Vittorio는 ‘비토리오’가 아니라 ‘빗토리오’이다. 그것은 ‘도토리’와 일본지명 ‘돗토리’가 다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이름이 두 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냥 ‘에마누엘레 2세’라고 해서는 안 된다.)


이탈리아 통일의 구심점이 되었던 빗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기마상.


그러던 1842년 3월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가 오스트리아 통치하에 있던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 오페라 공연 중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히브리인들이 머나먼 고향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합창 ‘Va’, pensiero, sulle ali dorate(가라, 생각이여, 금빛 날개 위에)’는 외세 지배 하에서 통일을 염원하던 이탈리아 사람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았으며 또 순식간에 입에서 입으로 알려져 모든 사람들 사이에 불려지게 되었다.




지금도 이탈리아에서는 이 오페라 공연 중에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즉 <바, 펜시에로>가 나오면 청중들은 모두 일어서고 곡이 끝나면 비스(앙코르)를 요청한다.

 

이 오페라가 등장한지 5년 후인 1847년, 20세의 제노바의 대학생 고프레도 마멜리가 <이탈리아인들의 노래>라는 제목의 애국시를 썼다.


다음해에는 같은 제노바 출신 음악가 미켈레 노바로가 이 시에 곡을 붙였다. 이것이 바로 <인노 디 마멜리>인데 이 노래는 전선에서 싸우던 이탈리아 의용군 사이에서 널리 퍼졌다. 그런데 의용군으로 참전한 마멜리는 1849년 로마에서 교황청을 지원하는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후 22세의 나이에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후 이탈리아는 우여곡절 끝에 1861년에 빗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구심점으로 이탈리아의 북동부 지방과 교황령을 제외한 채 제1차 통일을 이룩했고 1870년에는 교황청의 수도이던 로마를 점령함으로써 명실공히 통일국가를 이룩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꼭 150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로마는 다음해에 통일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1849년과 1870년 로마전투에서 희생된 통일군의 유골이 안치된 기념비.


로마의 심장부에는 이탈리아 통일의 구심점이 된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왕 빗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바쳐진 기념관이 초점을 이룬다. 이 웅장한 기념관은 그가 서거한지 7년이 지난 1885년에 착공하여 제1차 이탈리아 통일 50주년이 되던 1911년에 완공되었다.




그런가하면 1895년에는 로마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자니콜로 언덕 정상부에는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의용군을 이끌던 영웅 가리발디 장군 기마상이 세워졌고 이 언덕 중턱에는 1849년과 1870년에 있었던 로마전투에서 희생된 의용군과 정규군의 유골을 보존한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곳에는 마멜리의 유골도 안치되어있다.


자니콜로 언덕에서 내려다 본 로마 시가지. 오른쪽 흰 건물이 빗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이다.


한편, <인노 디 마멜리>는 통일전쟁 기간 중에 널리 애창되다가 1946년에 국민투표에 의해 이탈리아가 왕국에서 공화국으로 바뀌면서 임시 국가(國歌)가 되었다. 


그러다가 50여년이 지난 2017년 12월30일에야 정식으로 공식 이탈리아의 국가로 승격되었다. 음악적 완성도가 높은 베르디의 곡이 채택되기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아쉬워하겠지만 <인노 디 마멜리>가 이탈리아 통일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아직도 지역감정이 강한 이탈리아 국민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정책브리핑




Riccardo Muti - Italian National Anthem/Inno di Mameli - Speech in the Italian Parlia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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