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 소풍 [홍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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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 소풍

2020.07.21


나이 들면서 일어나는 변화 중 하나가 꿈에 관한 일입니다. 어린 시절엔 거의 매일 밤 꿈을 꾼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꿈이 적어졌습니다. 적어지기만 한 게 아니라 어쩌다 꾼 꿈도 잠깨고 나면 기억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꿈이 없어지는 현상은 서운한 일입니다. 꿈꾼다는 사실만으로도 희망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현실에서 즐거움이나 괴로움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심리학자라면 뭐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개인의 경험에 따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어느 날엔가는 잠자리에서 눈을 뜨자마자 꿈 내용을 메모지에 적기도 했습니다.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후 몇 차례 적은 것을 나중에 보면 남겨둘 만한 내용이 아니라고 판단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메모하는 행동을 정당화합니다. 꿈을 꾼 사건이 반갑기도 하고, 적어두는 일이 생동하고 있다는 확증을 보존하는 일이라고 여겨서입니다.

적어두지 않은 꿈의 기억을 이제 기록하려 합니다. 초등학교 시절 부산의 영도에 살았는데 성인이 되어서도 영도에 얽힌 꿈을 많이 꾸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꿈도 역시 빠른 속도로 적어졌습니다. 그런데 두 해 전쯤의 꿈은 기록해두지 않았는데도 비교적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영도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여 얼마 지난 뒤 학교 뒤편 언덕 위에 있는 신선동의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거기서 2학년 겨울 방학을 넘겨 지냈습니다. 집에서 몇 걸음 걸어 나오면 언덕 아래로 학교 전체가 보였습니다.

등교할 때는 언덕 위의 왼편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갔습니다. 학교 운동장 울타리 한참 너머 있는 길을 걸었습니다. 언덕 윗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내려가다가 평지 가까이 가면 학교 쪽으로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고 꽤 큰 교회도 있었습니다. 그 근처에서 다시 우회전하여 학교 울타리는 보이지도 않는 길을 따라 얼마간 걸으면 큰길을 만납니다. 거기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정문이 보였습니다.

집 바로 옆에는 도랑이 있었고 그 도랑은 언덕을 따라 내려가서 학교를 관통하여 정문 옆쪽으로 흘렀습니다. 신선동에서 2년 정도 살면서 도랑 너머의 길, 그러니까 오른쪽 길로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습니다. 학교 갈 때 그 길로 가려면 먼 길이 되니 그랬을 겁니다. 영도다리를 거쳐 광복동이나 남포동으로 가려 해도 학교 가던 길로 가야 단거리가 되었습니다.

꿈속에서는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가지 않던 도랑 너머의 그 길을 걸었습니다. 꿈속이니까 가능한 일이 더 벌어졌습니다. 그 길 주변 전체가 평화로운 녹초지로 변했습니다. 여기에 현실이 살짝 개입했나 봅니다. 가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이어서 그랬을까요. 그렇지만 서두르지 않고 방향을 찾아보았습니다. 갈래길에서 이 길로 가 보다가 돌아와서 저 길로 가 보고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나무도 없는 나지막한 구릉 길이었는데 길을 잃었습니다.

꿈다운 일은 더 생겼습니다. 장소가 중고교 때 살던 불광동과 오버랩되었습니다. 영도 신선동의 집과 학교 정문이 서울 불광동의 집과 버스 종점으로 바뀌어 나타났습니다. 꿈속에서는 이 양쪽의 장면이 번갈아 연출되었습니다.

종점에서 집까지는 15분쯤 걷는 길인데 불광천의 한 지류인 개천 옆길을 거슬러 갑니다. 그 길은 그렇게 해서 불광초등학교 앞을 지나 조용한 주택가를 한참 걸어 나타나는 꽤 넓은 밭의 끝 부분의 우리집으로 통했습니다. 거기서 길 따라 조금만 더 걸으면 낮은 언덕을 넘어갑니다.

꿈속에서 이 두 장소가 오버랩된 실마리를 나중에 생각해 보았습니다. 불광동의 집에 살 때 뒤편 언덕을 넘어 다닐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학교 다니려면 버스 종점에 가서 타는 게 편리했으니까요. 중3 때부터 다니던 교회도 종점 가까이 있었습니다. 영도의 집에서 다니던 길과 다니지 않던 길, 불광동의 집에서 다니던 길과 다니지 않던 길이 서로 평행의 상태가 된 셈입니다.

어쨌든 꿈속의 불광동 장면은 종점 부근의 개천 옆길을 걷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거기서 작은 가게의 물건을 사면서 약간의 부산을 떨었는데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그 길이 영도초등학교 정문에서 언덕 위 신선동의 집으로 향하는 길과 오버랩된 셈입니다.

그런가 하면 꿈속 어느 날 불광동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종점을 지나쳤습니다. 그러면 고개를 넘어 오늘날의 연신내역이나 구파발역까지로 이어집니다. 꿈속에서는 연신내든 구파발이든 모두 벌판으로 보였고 중장비들이 땅을 파고 있었습니다. 어디에선가 버스를 내려 집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별로 다녀보지 않았어도 현실에서는 길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꿈에서는 길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다가 영도 신선동의 도랑 너머 길로 변했습니다. 그러니까 평온한 초지 사이로 난 길이 되어버린 거지요.

그러고 보니 꿈속에서 길을 잃은 시점(時點)이 언제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불광동 시절 버스에서 내려 걷다가 발생한 것인지 초등학교 시절 집에서 나와 도랑 너머 길을 가다가 발생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꿈에서 그런 식의 독특한 상황은 흔하게 겪어보았으니까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어쩌면 초등학교 시절과 중고교 시절을 초월한 제3의 관점으로 그 모든 일을 겪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시간과 장소도 넘나들면서 말이지요. 그러면서도 공간 구성에 동일성이 있습니다. 신선동 집에서 학교를 바라보면 걸어간 길은 왼쪽이고, 불광동 집에서 종점 방향으로 서면 역시 걸어간 길은 왼쪽입니다.

두 시기의 두 장소가 겹쳐져 나타난 일이 신기합니다. 다중 오버랩이라고 해야 하나요? 꿈 해석 능력이 없는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입니다. 내면의 상상력이 과거의 두 기억을 조합하여 연출해 낸 작품이라고요. 거기에 환상까지 더해졌습니다. 도랑 이쪽이든 저쪽이든 올망졸망하게 집들이 모여 있었는데 한쪽이 아름다운 초지로 변한 것이 그렇습니다. 중고교 때의 연신내와 구파발은 이미 다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꿈에서 허허벌판이 되어 굴착기가 땅을 파고 있는 지역으로 나타난 것도 그렇습니다. 두 지역이 겹쳐 그려진 것은 미지의 세상이라는 뜻인가 봅니다.

오늘 속으로만 지니고 있던 꿈속 이야기를 공개하였습니다. 여름 저녁 석양빛을 받는 구름을 보다가 괜히 오래된 기억이 떠올라서 그러려니 생각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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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홍승철

고려대 경영학과 졸. 엘지화학에서 경영기획 및 혁신, 적자사업 회생활동 등을 함. 1인기업 다온컨설팅을 창립, 회사원들 대상 강의와 중소기업 컨설팅을 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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