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꽃·노을에 물든 나그네 [노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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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꽃·노을에 물든 나그네

2020.07.01


“무슨 나무 심을래 /십리 절반 오리나무/열의 갑절 스무나무/대낮에도 밤나무/방귀 뽕뽕 뽕나무/깔고 앉아 구기자나무/거짓 없어 참나무/그렇다고 치자나무/칼로 베어 피나무/입 맞춘다 쪽나무/너하구 나하구 살구나무/갓난 애기 자작나무/앵돌아져 앵두나무/동지섣달 사시나무/바람 솔솔 솔나무(하략)”

전라도 지방에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나무타령’입니다. 재미있는 노랫말에서 옛사람들의 나무에 대한 애정이 느껴집니다. 앵두나무를 묘사한 ‘앵돌아지다’라는 표현이 특히 반갑습니다. ‘토라지다’와 같은 뜻의 순우리말입니다. 토라져 ‘앵’ 소리를 내며 고개를 홱 돌리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나요?

언젠가 “‘앵돌아지다’는 앵두 닮은 입술을 삐죽거리는 귀여운 여자 아이의 모습을 보고 만든 말 같다”고 했다가 꾸중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소녀만 그런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유. 나이 많은 남자 어른들도 언짢으면 ‘앵두’ 같은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고개를 홱 돌릴 수 있슈!” 순간 편향적 시각으로 단어를 판단한 것이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매실이 어떤 나무의 열매인지 알아? 오디는?” 전북 전주에 사는 세 살 터울의 동생이 물어봅니다. ‘나무타령’도 동생이 알려준 노래입니다. 서울에서 살다가 전주로 이사 간 지 10여 년. 동생은 자연과 함께하는 시골살이의 즐거움에 빠져 사계절 내내 열매로 효소를 담그고, 청을 만들고, 술을 빚습니다.

요즘엔 ‘뽕’에 취해 산다고 하네요. 놀라셨나요? 마약이 아니라 뽕나무와 그 열매를 먹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잎은 살짝 데쳐서 무쳐 먹고, 가지와 뿌리는 차로 끓여 마시고, 달콤한 열매는 냉동시켜 간식으로 먹는답니다. 뽕나무 열매가 오디, 매화나무 열매는 매실입니다.

동생네 집엔 지금쯤 오디는 물론 앵두, 살구, 매실, 복숭아, 보리수가 달큰한 향을 내며 술로 잘 익어 갈 것입니다. ‘술 익는’ 구절에서 혹시 이 시를 떠올렸나요?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1940년대 초 스물일곱 살 청년 목월이 쓴 ‘나그네’입니다.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지훈에게’라는 부제가 눈에 띕니다. 다섯 살 아래 절친인 지훈에게 편지와 함께 시를 받은 후 크게 감동해 쓴 화답시입니다. 그런 까닭에 조지훈의 ‘완화삼’과 박목월의 ‘나그네’는 감정이 오묘하게 통합니다.

“차운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운율이 살아 움직이는 주옥같은 시들입니다. ‘완화삼’의 뜻이 궁금해 국어사전을 살폈는데, 없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한자식 조어로 봐야겠습니다. 玩花衫, ‘꽃을 완상하는 선비의 적삼’이라고 글자 그대로 풀이하니 뭔가 좀 아쉽습니다. 이럴 땐 ‘표현의 달인들’이 부럽습니다. 김사인 시인은 ‘완화삼’을 ‘술과 꽃과 노을에 붉어진 나그네의 저고리’라고 풀이했습니다. 시인다운, 참으로 멋진 해석입니다.

경주의 여관방에서 밤새도록 문학과 삶을 이야기했을 청년 목월과 지훈을 떠올리니, 집에서 담근 잘 익은 술이 마시고 싶습니다. 요즘처럼 더운 날씨엔 보리로 만든 맥주도 시원하지만 찬 성질의 곡물인 밀로 빚은 막걸리가 아주 맛있습니다. 특히 배꽃이 필 때 담근 이화주(梨花酒)에 얼음물을 타서 마시면 뼛속까지 시원하지요. 희고 고운 자태 속 부드럽고 달보드레한 맛에 푹 빠질지도 모릅니다. 비 내리는 날, 맘 통하는 이들과 시를 안주 삼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 한잔 하면 좋겠습니다. 집집마다 술을 빚어 마시던 풍습이 다시 살아난다면 더더욱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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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노경아

경향신문 교열기자·사보편집장, 서울연구원(옛 시정개발연구원) 출판담당 연구원을 거쳐 현재 이투데이 부장대우 교열팀장. 우리 어문 칼럼인‘라온 우리말 터’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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