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라 읽고 문예라 쓴다-예술적 문예 [한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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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라 읽고 문예라 쓴다-예술적 문예

2020.06.19

올해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지 '창조' 발간 100주년을 맞아 문예커뮤니케이션학회가 실시한  설문 조사에 의하면, 문예지 독자의 92.9%가 문예창작인들로 나타났습니다. 일반인들은 7.1%만 문예지를 읽고 있는 셈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제가 어떤 글을 쓰기 위해 직접 조사를 했는데, ‘문학’을 키워드로 한 인터넷 카페 회원 수는 300만 명이 넘는 거로 나타났습니다.

인터넷상에는 300만 명이 넘는 회원들이 나름대로 문학 활동을 하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 최고의 유명 문예지 발행 부수는 회당 1만 부를 넘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문학 동호인들을 흔히 말하는 ‘순수문학’과 거리를 둔 아웃사이더들이라고 해도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예술의 가치와 기준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정의를 내릴 수는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술가가 만든 창작품을 감상자가 공감할 때 ‘예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거와 다르게 현대에 들어서서 예술품을 보는 안목은 일부 전문가들의 몫이 아니고, 대중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시각적 예술이나, 청각적 예술은 예술가보다 감상자들의 위상이 커지고 있습니다. 문예도 작가가 창작한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공감 지수가 높아질수록 문예로서 가치를 높일 수 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시인이나 작가가 독자를 의식한다는 것은 문예 창작인의 권위와 위상을 떨어뜨리는 행위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그 배경은 어제오늘이 아니고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조선 시대부터 근대까지 사랑방 문화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랑방 문화의 핵심은 사랑방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내 편이고, 사랑방 밖의 사람은 적으로 간주하는 심리입니다. 따라서 사랑방에서 접대를 받거나 숙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집주인과 각별한 사이이거나, 귀하게 대접을 받아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랑방에 앉아서 시를 짓거나 낭독하기도 하는데, 그 시들은 사랑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짓거나 낭독을 합니다. 행랑에서 묵는 과객(過客)이나 하인들에게는 시를 이해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랑방에서 낭독하는 시는 알아서도 안 된다는 관습이 사랑방 사람들 사이에 은연중 묵계로 되어 있습니다.

근대에 들어서도 문예 창작은 일부 지식층들의 몫입니다. 사랑방처럼 일부러 독자들이 문예 작품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지 않았지만, 사회적 여건이 문예 작품을 읽어 줄 여유가 없었습니다. 독자가 없는 문예 작품을 생산하다 보니 ‘시인이나 소설가는 가난하게 살 팔자’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아무리 좋은 시를 써 봤자, 그 시를 읽어주는 독자들이 없으니까 시인은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작품을 읽어주는 두 독자층이 일반인이 아니고 문예인들 이라도 문예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도 시인은 시인을 위한 시를 쓰고, 소설가는 소설가를 위한 소설을 쓰다 보니 독자들은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독자가 없는 작품, 이를테면 예술에서 감상자가 없는 창작품은 상상력의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 문예계에서 계파(系派)를 벗어나면 성공하기 힘든다는 말이 생겨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곧, 독자들과의 공감대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고 스승의 안목에 맞는 작품을 쓰다 보니, 시나브로 독자들과의 거리가 더 멀어지고, 문학이 죽어가고 있다는 말이 생겨난 배경입니다.

‘문예’ 즉 예술을 바탕으로 문예 창작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해야 합니다.
아름다움의 본질은 진실입니다. 진실은 모든 사람이 가진 본바탕입니다. 지하철에서 늙고 초라한 할머니가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냥 구경만 합니다. 어느 젊은 여자가 뛰어가 할머니를 부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기 목도리를 할머니의 목에 감아 줍니다. 지하철 안에는 착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좀도둑도 있을 것이고, 사기꾼이며, 협잡꾼, 젊은 대학생이며, 중년의 주부며 군인이 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 모두 할머니 목에 목도리를 걸어주는 젊은 여자의 선행에 모두 한마음이 되어 손뼉을 칠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환경이나 방법은 달라도 진실을 갈구하는 마음은 누구나 같습니다. 모든 인간의 본바탕에는 진실의 강물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강물은 아름다움이 펼쳐져 있는 바다로 흘러갑니다. 예술가의 힘은 감상자들을 아름다움의 바다로 이끌어서 탄성을 지르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하나, 문예 창작에 있어서 문학적 접근은 진실보다는 기교(技巧)가 앞장섭니다.
문예인의 영혼은 자유스러워야 합니다. 개성이 억압을 받으면 영혼이 자유스러워질 수가 없습니다. ‘시는 이렇게 써야 한다’라는 시선으로 ‘시적 대상’을 바라볼 때와 단순히 ‘시를 쓰겠다’라는 생각으로 ‘시적 대상’을 바라볼 때의 시선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전자는 시적 대상을 형식의 틀에 맞추는 것이고, 후자는 시적대상을 시로 승화시키는 방법입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작가들이 에세이집이나, 이런저런 경험담을 담은 자기 고백 형식의 산문집을 출간하는 추세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대부분 작가의 집필 의도보다는 출판사의 상업적 전술을 앞세워 출간되고 있습니다.

출판사는 책이 많이 팔려서 좋습니다. 작가는 인세 수입이 많아서 좋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이라서 산문집 출간은 유행처럼 번져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문예 창작인들은 무조건 문예성이 있는 작품만 쓰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책이 잘 팔리던 시절에는 ‘잡문(雜文)’으로 여기던 산문집도 불경기를 핑계로 공들여 쓰고 있습니다.

300만명이라는 인터넷 동호인들은 여전히 나름대로 ‘시인’, ‘작가’라는 타이틀을 명함에 박고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데. 문예 시장이 갈수록 위축되어 가고 있다는 점은 작금의 문예 창작 형태를 반성해 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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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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