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딜 이름이 아깝다

[장경덕 칼럼] 뉴딜 이름이 아깝다


뉴딜은 새로운가

뉴딜은 딜인가

`최고딜책임자`는 누구인가


    "우리는 돈을 쓰려고 애써왔습니다. 유례없이 많은 돈을 쓰고 있지만 효과가 잘 나지 않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일자리를 얻는 걸 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약속을 제대로 지킨 적이 없습니다.



장경덕 논설위원


이 정부가 들어선 지 8년이 지났지만 실업률은 처음 시작할 때만큼 높습니다. 갚아야 할 부채도 엄청납니다." 1939년 5월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의 재무장관 헨리 모겐소가 하원 청문회에서 한 말이다. 대통령의 가까운 친구인 그가 `뉴딜(New Deal)`의 실패를 자인하는 듯한 증언을 한 것이다. 뉴딜이 과연 미국을 대공황의 늪에서 건져내는 데 효과적이었는지는 논쟁거리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엄청나게 성공적이었다. 시장자본주의의 나라 미국에 큰 정부를 도입한 뉴딜로 민주당은 1980년대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나타날 때까지 반세기 동안 의제를 주도했다.




한국판 뉴딜은 어떨까. 문재인 대통령이 "선도 국가로 도약하기 위한 새로운 국가 발전전략"으로 띄운 만큼 뉴딜은 이 정부의 핵심 의제가 될 것이다. 5년간 76조원을 투자하는 밑그림도 나왔다. 강화된 고용안전망을 바탕으로 디지털과 그린 뉴딜을 추진하면 현 정부 임기 내에 창출될 일자리만 55만개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뉴딜이 처음 거론되기 시작했을 때 나는 큰 기대를 가졌다. 그 얼개가 드러났을 때는 적잖이 실망했다. 한국판 뉴딜은 과연 새로운가. 그것은 딜이라고 할 만한가. 그다지 새롭지도 않고 제대로 된 딜도 아니라면 뉴딜이라는 이름은 과분하지 않은가.


다음달에 나올 뉴딜의 청사진이 이름값을 하려면 지금의 얼개와는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무엇보다 새로운 의제와 접근법을 보여줘야 한다. 물론 디지털 생태계와 녹색 인프라스트럭처를 구축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 경제와 사회에 가장 절박한 문제들을 풀어가려면 훨씬 더 크게 봐야 한다. 파이를 키우고 나누는 문제부터 보자. 산업화 시대의 빠른 추격자였던 우리는 창조적 파괴의 선도자로 거듭나야 한다. 그러자면 사고와 제도의 혁명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이념과 계층, 세대, 지역 간 이해가 엇갈려 혁신의 동력이 떨어지면 파국이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뉴딜은 또한 믿을 만한 실행력이 담보돼야 한다. 장밋빛 비전과 수사로만 버무린 뉴딜은 딜이 아니다. 현실의 딜은 설득과 타협의 격전장에서 이뤄진다. 좋은 일자리와 복지 혜택과 교육 기회를 누가 차지할 것이냐, 그 비용과 위험은 누가 부담할 것이냐를 놓고 격렬하게 충돌하는 이해를 조정하는 것은 지난하다. 뭔가를 해주겠다는 약속만 쏟아내지 말고 누구의 부담으로 어떻게 할지를 말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제로섬 게임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확실히 플러스섬 게임이 될 방도를 내놓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딜의 요체다. 뉴딜을 하려면 `최고 딜 책임자(Chief Deal Officer)`가 있어야 한다. 중요한 딜은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한다.




지금껏 정부는 그런 딜을 잘 하지 못했다. 디지털혁명 시대에 대세인 공유경제의 해법은 이해당사자끼리 알아서 합의해오라고 책임을 미뤘다. 팬데믹이라는 위기의 순간에도 본격적인 원격의료 도입을 설득하지 못했다. 일자리와 투자가 그토록 절실하다면서도 수도권 규제 완화 요구와 균형 발전의 논리 사이에 타협안을 내놓지 못했다. 노동의 안전성과 유연성을 함께 높이기 위한 노사정 대타협은 여전히 평행선만 달리고 있다. 대선 공약인 국민연금 개혁은 슬그머니 다음 정부로 미루려고 하고 있다. 보편적 복지는 늘리겠다면서 보편 증세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다. 뉴딜은 지금껏 해온 것처럼 해선 안 된다. 미국 경제가 공황을 탈출한 것은 뉴딜보다 전쟁 덕분이었다.


우리는 그런 우연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반드시 성공할 뉴딜의 청사진이 나와야 한다. 뉴딜은 뉴딜다워야 한다. 나는 아직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장경덕 논설실장]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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