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차와 이야기가 있는 책방 [노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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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차와 이야기가 있는 책방

2020.06.03

월간지 편집장인 내 친구는 ‘차(茶)와 술과 이야기가 있는 책방’을 내는 게 꿈이랍니다. 서울 강북 언저리의 허물어져 가는 (비교적 싼 값의) 집을 산 후 단순하고 세련되게 개조할 계획이랍니다. 책방이 완성되면 종잇밥 먹으면서 만난 연예인, 교수, 작가들을 매주 초청해 ‘작은 콘서트’를 열겠다고 합니다.

그녀가 책방 안 작은 무대에 앉아 손님들과 이야기하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그녀의 우스개에 활짝 웃는 젊은이들, 진한 농담으로 분위기를 더욱 띄우는 중년 신사들의 모습도 그려집니다. 세심한 그녀는 누군가의 빈 잔이 눈에 들어오면 재빨리 찻(술)주전자를 가져다 채워 줄 것입니다. 그러곤 이렇게 말하겠지요. “아휴~ 잔이 비었으면 삐삐라도 치시지 그랬슈~” 어정쩡하게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서울 여자 내 친구가 참 사랑스럽습니다. 인정 넘치는 그녀는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그곳에서 ‘문화 사랑방’ 주인장 노릇을 톡톡히 해낼 것입니다.

마을 책방은 짧은 대화에 행복해하고 소소한 것에 흠씬 빠질 줄 아는 소박한 마음씨의 주인장이 열어야 합니다. 그래야 책방을 찾는 이도, 책방 앞을 지나는 이도 덩달아 웃음이 묻어날 테니까요. 로맨틱 코미디 영화 ‘유브 갓 메일’의 주인공 멕 라이언 같은 책방 주인이라면 환상적(내가 스승으로 모시는 언론 대선배께선 ‘환상적’을 넘어 ‘환장적’이라고 말씀하실 듯)이겠지요.

단발머리에 미소가 상큼한 영화 속 멕 라이언(캐슬린 켈리 역)은 뉴욕의 ‘길모퉁이 책방’ 주인입니다. 엄마한테서 물려받은 작은 책방을 알차게 운영하고 있죠. 그런데 ‘폭스 문고’라는 대형 서점이 들어서면서 위기에 처하고,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대형 서점의 주인은 톰 행크스(조 폭스 역)로, 서점뿐만 아니라 대기업을 운영하는 사장입니다.

영화 제목 ‘유브 갓 메일’은 ‘메일 왔어요’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책방과는 거리가 꽤나 먼 듯합니다. 전도연·한석규가 주연한 영화 ‘접속’의 미국판이랄까요. 책방 운영이 힘들어진 멕이 채팅방에서 알게 된 톰과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정(사랑과 우정 사이)을 쌓는 데 의미를 둔 듯합니다. 멕에게 책방은 어릴 적 엄마와의 추억이 담긴 곳이자 현재 자신의 생계수단입니다. 그런 소중한 책방의 어려운 상황을 톰에게 이메일로 털어놓으며 위로받곤 하지요. 길모퉁이 작은 책방이 대형 첨단 서점을 이겨냈을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게요.

2020년 우리네 동네 책방들은 “와~” 하고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변신했습니다. 독서는 기본. 차를 마시며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마련해 ‘문화 놀이터’로 거듭났습니다. 출근 부담이 없는 금요일 밤이면 삼삼오오 모여 날이 새도록 책 이야기를 하는 책방도 있습니다. 저자 초청 강연은 물론 작품 낭독회, 북콘서트도 열립니다.

책방에 책만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술을 마실 수 있는 책방도 여러 군데 생겼습니다. 맥주, 위스키, 와인 등 달콤한 술향에, 다양한 책향기가 어우러져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곳들이죠. 충북 괴산의 산골짜기에는 잠을 재워주는 ‘북스테이형’ 책방도 있습니다. 가족 혹은 친구들과 주인장이 좋아하는 책을 읽고 날이 새도록 토론하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정보뿐만 아니라 이야기와 낭만이 가득한 이런 공간은 ‘서점(書店)’이라 부르면 목에 가시처럼 뭔가 턱 걸립니다. 아마도 가게를 뜻하는 ‘점(店)’ 자 때문일 겁니다. 창고나 곳간이 떠오르는 ‘문고(文庫)’도 맘에 썩 내키지 않습니다. 책방(冊房). 따뜻한 아랫목 느낌의 ‘책방’이 입에 착 달라붙습니다. 재미와 정보와 지혜가 빛나는 삶의 소중한 공간입니다.

혹시 즐겨 찾는 동네 책방이 있나요? 마포에 사는 친구는 저녁마다 마실 다니던 ‘ㅎ문고’가 지난달 문을 닫았다며 몹시 아쉬워합니다. 대형 서점과 온라인 서점에 밀리던 터에 코로나까지 겹치자 주인장이 어렵게 폐업을 결정한 것 같다고 하더군요. 어디 이곳뿐일까요? 전국동네책방네트워크가 동네 책방 예순한 곳을 조사해 보니 열아홉 곳이 지난해 1~3월 대비 올해 같은 기간의 매출이 41~60%나 하락했다고 답했다는군요. 문 닫는 책방이 늘어날까 걱정입니다.

주인장이 반짝이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주민들이 맘껏 즐기는 것만으론 동네 책방이 살아남긴 힘들 듯합니다. 정부든 지자체든 힘을 보탰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마을 책방은 단순히 책만 파는 곳이 아닌 이웃끼리 문화를 향유하는 귀한 공간이니까요. 그래야 내 친구도 책방을 하루빨리 열 수 있을 테니까요.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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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노경아

경향신문 교열기자·사보편집장, 서울연구원(옛 시정개발연구원) 출판담당 연구원을 거쳐 현재 이투데이 부장대우 교열팀장. 우리 어문 칼럼인‘라온 우리말 터’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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