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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와 정의

2020.06.02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92)의 두 번의 기자회견에서 내가 받은 가장 깊은 인상은 “수요 집회는 학생들에게 증오와 상처만 가르친다.(5월 7일)”는 대목이었다. 이 할머니는 25일 기자회견에서도 “데모 방식을 바꿔야 한다”며 5개 항의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명예회복을 위한 현실적 방안수립, 평화인권교육관의 건립, 피해자문제 전문교육연구기관 설립, 정대협·정의연에 이은 새로운 역량준비 등의 해결방안이 증오보다는 이해와 교육을 통한 위안부 문제 해결에 중점을 둔 미래지향적인 방법이라는 점도 돋보였다.

대중을 선동하는 가장 강력하고 확실한 방법은 공격대상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는 것이다. 증오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표현은 최대한 선정적이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라면 거짓말도 주저할 필요가 없다.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게 ‘선동 없이 혁명 없다’는 말이다.

증오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있다. 미래를 증오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효과가 떨어지고, 때론 거짓으로 판명될 위험도 있다. 정부가 코로나19 대책으로 막대한 예산을 쓰고 있는데, 그것이 미래의 재앙이 될 것이라고 말해봤자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않는 이치와 같다.

닥쳐봐야 아는 미래를 염려하며 정부를 탓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유사 이래 처음 정부로부터 현금성 선물을 받았으니 감사히 쓰는 게 뱃속 편하다. 미래로 증오를 선동할 수 없기 때문에 정치인들은 늘 과거에서 증오할 것을 찾기에 혈안이다. 그 때 증오는 정의 또는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호도되기도 한다.

굴곡진 역사 속에서 우리에겐 증오할 과거가 많다. 일제와 한국전쟁은 증오를 낳은 원초적인 역사다. 이 증오의 역사를 해소하고 치유하기 위해 일본과 북한을 상대하기만도 벅찬 상황인데 보수 진보로 갈려 내전을 벌인다. 해방 이후의 역사 대부분이 증오의 불쏘시개가 되고 있다.

증오로 유지되는 정권 가운데 으뜸은 북한이다. 2018년 이후 잠시 남북 북미 간에 대화가 있었으나 그들의 최대 증오대상은 여전히 한국 미국 일본이다. 그들은 사전에 있는 ‘원수’라는 말로 증오를 표현하기 모자라 ‘원쑤’라는 글자를 날조해서 쓰고 있다.

북한의 한미일에 대한 증오는 휴전 후 67년이 지난 한국전쟁에서 기인한 것이다. 6·25 남침을 도발한 그들이 지금은 한미일의 북침공격에 대비한다는 이유로 핵무기를 만들어 놓고, 세 나라를 상대로 미사일발사 도발을 일삼고 있다.

북한은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고 평화롭게 살자는 한·미의 제의를 거부하며 체제를 자꾸만 과거 속에 가두고 있다. 증오는 이처럼 개인이건 국가건 간에 의식이나 행동을 과거에 얽매이게 함으로써 역사의 진전을 가로막는다. 북한의 낙후는 증오가 낳은 필연적 결과이다.

명색이 자유민주제도에 바탕한 대한민국에서도 새로운 집권세력이 들어설 적이면 국정운영의 동력을 증오에서 찾으려는 시도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것은 때로는 ‘과거청산’ ‘정의구현’ ‘진실규명’ 등의 명분으로 행해졌다.

그런 시도는 필요하기도 했고, 일정 부분 효과도 거뒀지만, 부작용도 컸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징역형을 받았고, 현재도 1,2심에서 징역형을 받은 박근혜 이명박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검찰 조사과정에서 자살까지 했다.

문재인 정부의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사법처리도 증오의 정치라는 평가가 있는 터에 민주당이 4·15총선에서 대승을 거둔 이후 그런 관행이 더 집요하고 잡다하게 확대재생산되고 있는 모습은 우려스러운 현상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5·18 40주년 기념식에서 처벌하지 않을 테니 발포명령자는 자수하라고 했다. 진보성향의 판사에서 국회의원이 된 민주당 비례대표 이수진 의원은 국립묘지에서 친일파의 묘를 파묘하겠다고 나섰다. 세월호 사건과 1987년 대한항공 858편기 폭파사건에 대한 재조사 요구도 완강하다.

이 증오와 연관된 사건들 중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김영삼 정부 이후 역대 정부에서 특별법을 제정하면서까지 진상규명, 주동자 단죄, 피해자 보상조치가 이뤄졌다. 현재도 전두환 대통령을 법정에 세워 진상규명이 진행 중이다. 실종자의 유골을 찾겠다고 광주의 땅을 파헤쳤지만 아직까지 나온 것은 없다.

친일파 파묘는 노무현 정부 때 친일인명사전을 만들면서 우리 사회가 치렀던 분열과 대립을 상기하게 된다. 미래를 향한다는 진보의 지향이 고작 묘를 파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세월호는 재판을 통해 진상이 규명됐고, 858편기 사건은 이미 노무현 정부 때 합동조사로 결론이 난 사건이다.

이용수 할머니가 “학생들에게 증오를 가르치지 말라”고 한 말은 일본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는 방법만으로는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뜻이라고 본다. 수요 집회 30년의 역사를 말하지만 그것으로 거둔 성과가 무엇인가를 되돌아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번 정의기억연대(정의연) 윤미향 전 이사장 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정의연이 할머니들을 위한 단체이기보다 단체를 위한 단체로 변질된 게 아니냐는 점이다. 그들은 단체의 존속을 위해 끊임없이 일본에 대한 증오를 부추겨야 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에서도 정부 여당 측이나 진보시민단체들은 정의연과 윤미향을 비판하는 세력을 친일로 매도하고 있다. 한일무역전쟁 때도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과 양정철 민주당의 민주연구원장 등 여권 측이 써먹었던 수법이다.

그런 행태를 통해 이들이 반대파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력임을 알게 된다. 현 정부와 정의연이 권력공동체로 존재하는 한 위안부 문제해결은 요원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증오의 영구화나 불치병화를 막을 책임은 정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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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종건

한국일보와 자매지 서울경제신문 편집국의 여러 부에서 기자와 부장을 거친 뒤 서울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사장을 끝으로 퇴임했으며 현재는 일요신문 일요칼럼, 논객닷컴 등의 고정필진으로 활동 중입니다.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및 감사를 역임했습니다. 필명인 드라이펜(DRY PEN)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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