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의 거리두기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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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의 거리두기

2020.05.22

5월의 제주도는 마스카니의 오페라 합창곡 제목처럼 오렌지 향기가 바람에 날립니다. 정확히 말하면 밀감 꽃향기인데 오렌지와 밀감이 한통속이니 그 냄새가 그 냄새 아닌가 생각합니다.
황금연휴가 지난 며칠 후 제주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같이 바람을 쐬고 싶다는 동행도 있어서 간 김에 하루 걷기로 했습니다. 마스크를 벗어 던져버리고 싶었습니다. 생각 없이 터벅터벅 걷고 싶어지니 이게 늙어가는 증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서귀포 카페에서 우연히 사단법인 ‘제주올레’의 안은주 상임이사를 만났습니다. 서울서 시사주간지 기자를 하다가, 선배 기자(서명숙)가 2007년 사단법인 제주올레를 설립하자, 남편과 딸을 서울에 둔 채 제주도로 내려가 올레길 개척에 투신한 천안산 열렬 여성입니다. 얼마나 버티며 살까 생각했는데 10여 년을 제주도에 살았고 남편도 제주도로 불러들였습니다.
낯이 익은 사이라 그에게 물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풀코스를 놀멍쉬멍(쉬엄쉬엄) 걸을 수 있는 곳이 어느 코스요?” 그가 대답했습니다. “4코스로 가십시오. 눈을 들고 걸을 수 있는 곳입니다.” 험한 암벽이나 경사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가 덧붙여 말했습니다. "나이 든 사람 걷기 좋고 비 오는 날 걷기 좋아요."

2명의 동행과 함께 표선 백사장에서 남원 포구까지 이어지는 올레 4코스 18㎞ 3만 보를 걸었습니다. 평탄하면서도 아기자기

올레 살림꾼 안은주

한 길입니다. 코로는 밀감 꽃향기가 들어오고 눈으로는 노란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핀 해변 풍광이 들어옵니다.
어촌 돌담이나 호텔 철망 울타리를 끼고 걷기도 하고 꽃이 하얗게 핀 밀감 과수원 옆을 지나기도 합니다. 새까만 자갈길도 있고 잔디 길도 있고 송림도 지납니다. 해녀들이 알려주어 명소가 된 대나무 터널 숲길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곳이었습니다.

이렇게 걷기 좋은 길이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올레 관광객을 다 쫓아내 버렸기 때문입니다. 평소 같았으면 깔깔대는 육지 아줌마들 소리가 파도소리를 덮었을 터인데 사람 그림자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5시간 정도 걷는 동안 올레꾼을 30명도 못 만난 것 같습니다. 혼자 아니면 커플들을 몇 차례 만났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스크를 끼고 있었습니다. 마스크 착용이 생활화되어버린 모양입니다.      
바닷가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습니다. 여자 종업원 한 사람이 아무 표정 없이 커피를 내려 주었습니다. 카페를 독차지해서 커피를 마시니 분위기는 허전했지만 커피 맛은 좋았습니다. 전기료도 못 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담벼락에 붙은 안내표지를 따라 식당을 찾아가 점심을 먹었습니다. 식당 주인과 종업원 서너 명이 평상에 앉아 있다가 우리를 안내했습니다. 우리가 첫 고객이었습니다. “뭐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옥돔국”이라는 대답이 나왔습니다. 제주도의 고급 별미, 무채를 넣어 끓인 옥돔국 값은 1만5천 원이었습니다. 우리가 마지막 손님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걷고 나서 코스를 알려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안은주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제주올레를 많이 걸었겠네요?”
“많이 간 코스는 100차례가 넘고 가장 적게 간 곳도 대여섯 번 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코스는?”
“어제 제가 갔던 코스요.” 나는 4코스라고 인사치레할 줄 알았더니 올레에 빠져 살아온 안은주다운 대답이었습니다. “엄마가 좋은가, 아빠가 좋은가.”라는 식의 질문을 하지 말라는 얘기였습니다.

코로나19 이후 세상은 변할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 사이 거리두기가 모든 인간 활동을 통제하는 기준이 될지도 모릅니다. 세계화와 중국인 관광 붐으로 사람이 넘쳐나던 제주도가 멈춰서 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이곳은 어떤 ‘뉴노멀’로 나타날지 궁금합니다. 제주 섬이 차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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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코스 초입의 해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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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 죽은 돌' 전설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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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숲 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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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 악귀를 쫓아내는 방사탑(防邪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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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으면 고래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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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 대신 고양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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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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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수종

‘뉴스1’고문과 ‘내일신문’ 칼럼니스트로 기고하고 있다. 한국일보에서 32년간 기자생활을 했으며 주필을 역임했다. ‘0.6도’ 등 4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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