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원수, 적이 도우미 되는 세상 [김홍묵]



www.freecolumn.co.kr

사랑이 원수, 적이 도우미 되는 세상

2020.05.08

-인간은 참 이상한 동물이다. 휴대폰에 찍힌 전화번호가 처음 보는 번호면 대부분 받지 않는다.
-집에 사람이 찾아와도 인터폰으로 슬쩍 보고 잡상인이거나 모르는 사람이면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돈을 꿔 주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처음 보는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

‘막시무스’라는 필명으로 이근영이 쓴 <지구에서 인간으로 유쾌하게 사는 법>이란 책에 나오는 ‘농담사전’ 중 ‘사랑’이라는 대목입니다. 그는 유명 인사들의 인생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펼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과 철학을 압축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특히 농담사전은 보통사람의 심리와 상식을 뒤엎는 반전(反轉) 논리가 미묘하고 특이합니다. 히죽 웃음이 나오면서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마력이 있습니다.

농담시리즈에서 ‘적’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적(敵)과는 판이한 인생 멘토입니다.
-적은 당신보다 당신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다. 적은 늘 당신의 단점과 허점을 생각한다. 적이 보는 당신의 모습은 당신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정확하다.(중략)
-그래서 적은 당신의 인생 도우미다. 만약 당신에게 적이 없다면 당신의 인생은 지금보다 개선될 여지가 거의 없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원수가 되고, 철천지원수인 적과도 동침하는 인간세태의 변화무쌍함이 마음먹기에 달렸음을 되새기게 하는 심상의 아이러니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터득한 해탈의 경지랄까. 아니면 잔망스럽고 간특한 인간에 대한 심리분석이랄까….
같은 사안을 두고도 생각의 틀(frame)을 바꾸면 삼라만상이 달라 보이는 요지경 현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남미의 브라질에는 원시시대부터 이어오는 결혼자격시험이 있다고 합니다.
브라질의 결혼자격시험은 엄격하고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우선 결혼하려는 남녀는 열흘간 정부가 설립한 전문기관에서 합숙하며 하루 6~7시간씩 결혼생활과 부부관계, 일반 위생과 자녀교육 등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이 과정이 끝났다고 바로 결혼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교육 과정을 끝내고 결혼자격시험에 합격해야 비로소 자격증을 받아 혼례를 치를 수 있다고 합니다.

합격하지 못한 사람도 결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하루 이틀 재교육을 받은 후 다시 자격시험에 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도 떨어져 자격증을 받지 못한 채 결혼하면 아무런 법률적인 보장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자녀 입학이 제한되고, 사회적 지위를 공인받지 못하며, 재산상속 문제에 있어서도 부부로서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1가구 1자녀 정책을 엄격히 적용하던 중국에서 둘째 아이부터는 호적에 올리지도 못했던 헤이하이즈(黑孩子)처럼 아이들은 공중에 뜨고 맙니다.

이러한 풍습은 과거 부족사회 시절 통나무를 짊어지고 옮기거나 채찍질을 견뎌 내는 등 부족마다 다른 테스트 관습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남성의 노동력과 종족보존 능력에 방점이 주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평균연령이 높아지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육체적 테스트가 아닌 시험으로 바뀌었습니다.
꼭 자격시험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오늘날 브라질은 세계에서 이혼율이 가장 낮은 나라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우리의 상식과는 엄청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소소(簫簫)히 보내고 나서 새삼 ‘사랑’과 ‘적’을 떠올린 것은 불교 개혁을 주창한 휴암(休庵 1941~1997) 스님의 법문이 떠올라서입니다. 스님이 입적한 그해 봄 경북 영천 은해사(恩海寺) 말사인 기기암(寄寄庵)에서 주지스님 휴암의 법문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다 제쳐두고 기억에 남는 건 기기암이 기신사바 기심정토(寄身娑婆 寄心凈土 : 몸은 속세에 있지만 마음은 극락에 있다)에서 유래했다는 설명입니다. 허허바다에서 마음 둘 곳을 알려주는 나침반이랄까….

계절의 여왕, 가정의 달을 맞은 이 봄에 결혼을 연애의 무덤으로 만들지 않는 사랑, 적도 동지로 받아들이는 아량과 포용이 충만한 5월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허황한 송춘가(頌春歌)를 읊어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김홍묵

경북고,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대구방송 이사로 24년간 언론계종사.  ㈜청구상무,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 ㈜화진 전무 역임.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