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부정선거


4,19혁명 촉발 3.15부정선거 주도혐의 자살 이기붕

자유당정권은 이승만 대통령 하야와 함께 붕괴


관련자들 모두 사형선고 받아


   3.15부정선거 주도혐의로 자살한 이기붕이 4.19 혁명일인 19일 주목을 받고 있다.

이기붕 본관은 전주이며 호는 만송이다.


이기붕


서울 출생. 효령대군 보(示甫)의 17대손이며, 아버지는 예조판서 회정의 손자 낙의이다.

부인 박(朴)마리아와의 사이에 강석·강욱 두 아들을 두었다.


1956년 자유당의 공천을 받아 부통령에 입후보하였다가 낙선했다.


자유당정권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함께 붕괴되고, 이기붕 일가는 경무대관사 36호실에 피신하여 있다가 4월 28일 맏아들 강석의 총격으로 집단자살하였다. 그가 살던 서대문의 집은 4·19혁명학생도서관이 되었다.

박찬식 기자 news@thekpm.com 농업경제신문


 

자료 : 3.15의거 기념사업회




3.15 부정선거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부정선거. 한국 헌정사 이래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와 부통령 선거 사상 최악의 흑역사들 중 하나다. 그리고 이 사건을 기점으로 부정부패로 가쁜 숨을 내쉬던 자유당 정권은 얼마 안 가서 4.19 혁명을 맞고 몰락한다.


3.15 선거가 국회에 의해 무효 처리되었다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잘못된 상식이다. 국회에서 4월 26일 통과시킨 건 이승만 대통령에게 즉각 하야 및 정부통령 재선거 실시를 요구하는 결의안으로, 법적 구속력을 갖는 조치가 아닌 하나의 권고안이었다. 다만 3.15 선거의 두 당선자가 모두 임기 개시 전 사퇴하거나 사망해서 4대 대선을 다시 치르게 된 것 뿐이다. 애초에 선거를 무효시킬 권한은 국회가 아니라 대법원에 있었다.


또한 이 선거는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중 직선제 대선으로는 유일하게 후보가 1명밖에 없는 선거였다. 당시 대통령 선거법에는 후보가 1명인 경우 무투표 당선되는 게 아니라 선거를 치러서 총 선거권자의 1/3을 득표해야 하도록 하고 있었다.


[전문]

https://namu.wiki/w/3.15%20%EB%B6%80%EC%A0%95%EC%84%A0%EA%B1%B0




3.15 부정선거 이기붕의 몰락

1960년 제5대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다.

3·15 부정선거를 통해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21], 4·19 혁명이 일어나자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수도육군병원으로 옮겨진 이기붕의 시신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1960년의 3.15 부정선거는 임기를 마칠 가망이 없는 고령의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대통령 유고시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의 지위에 이기붕을 앉히려는 것이었다.


4월 28일 새벽, 이승만 정권의 몰락으로 자신이 위험에 처해진 이기붕은 미국으로 도주하려고 했었으나, 경무대 별관에서 당시 육군 소위로 복무 중이던 아들 이강석(李康石)이 권총으로 이기붕과 박마리아, 동생인 이강욱(李康旭)을 차례로 쏘아 죽이고 자살하여 그의 일가족은 멸문지화를 당하였다.(이에는 이강석이 죽였는지 다른 누가 죽였는지 논란이 있다. 4.19혁명참고)

위키백과




snsmeia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