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의 어둠을 밝히는 온라인 공연 [방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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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의 어둠을 밝히는 온라인 공연

2020.04.06

어제는 키릴 페트렌코(Kirill Petrenko)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의 연주를 들었습니다. 구 소련 옴스크에서 태어난 유태계 러시아 사람 키릴은 꼭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처럼 생겼습니다. 그의 곰살가운 표정과 몸짓이 유려하게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베를린의 상징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모인 수많은 무료 관객들을 위한 노천 연주회였습니다. <2019년 8월 24일 공연>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노래한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 듣는 이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걸작이지요. 1, 2악장에서는 저 가슴속 밑바닥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용암처럼 뜨거운 것이 몇 번이나 꿈틀거리다 가라앉기를 반복합니다. 3악장에선 마치 그 뜨거움을 달래는 듯한 아름다운 선율이 계곡의 물소리처럼 잔잔히 흐르다가 마침내 폭발하는 환희의 합창이 4악장에서 이 대작의 절정을 이룹니다.

“오! 벗들이여. 이 소리가 아니오. 좀 더 즐겁고 환희에 넘친 노래를 함께 부르세!
(O Freunde, nicht diese Toene! Sondern lasst uns angenehmere anstimmen, und freudenvollere)”

환희의 송가를 여는 이 멋진 서창을 자랑스럽게도 우리나라의 베이스 연광철이 우렁찬 목소리로 불렀습니다.

오늘은 쇼스타코비치의 7번 교향곡 ‘레닌그라드’를 역시 베를린 필의 연주로 들었습니다. 2차 대전 중 약 900일에 걸친 나치 독일군의 봉쇄 작전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포탄에 맞아 죽고 굶어 죽고 병들어 죽어간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근 2년 반의 봉쇄가 풀렸을 때 250만 도시 인구가 50만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작곡가는 자신이 태어나고 사랑했던 고향에 이 곡을 바쳤습니다. 그 처절했던 봉쇄 기간 첩보작전처럼 악보가 죽음의 도시로 전달되고, 목숨을 부지한 연주가들이 모여 이 곡을 연주했다지요. 당시 포위한 독일군마저 숙연히 들었다는 ‘레닌그라드’를 오늘은 동베를린 태생의 미하엘 잔데를링(Michael Sanderling)이 지휘했습니다. <2019년 6월 1일 공연>

마치 진격의 행군 소리처럼 무겁게 시작된 곡은 점차 길고 긴 고난을 이야기하듯 가냘픈 선율로 이어집니다. 반복되는 진군의 리듬, 불안과 혼돈의 소요, 인내의 고요, 절망 가운데 피어오르는 승리에의 기대, 생존의 환희. ‘레닌그라드’는 아마도 그런 희망을 노래한 듯합니다.

지휘자 미하엘은 세계 대전 이전에 동프로이센에서 태어나 독일과 소련에서 활약했던 쿠르트 잔데를링(Kurt Sanderling)의 아들입니다. 베를린 국립극장 지휘자였던 유태 혈통의 아버지 쿠르트는 나치 광풍이 몰아치던 1935년 모스크바로 망명했고, 2차 대전 중에는 독일군의 봉쇄로 참혹한 희생을 치른 바로 그 레닌그라드에서 지휘자로 지냈던 기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1960년 독일로 돌아온 그는 베를린과 드레스덴에서 토마스, 스테판, 미하엘의 세 아들과 함께 지휘자 가족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어제오늘 뜻하지 않은 안방 음악회의 호사는 친구의 귀띔 덕분이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창궐로 전 세계의 공연과 전시가 취소되거나 무기한 연기되는 게 현재 상황입니다. 듣고 싶어도 공연장을 찾기 어렵고, 보고 싶어도 극장을 찾아 나서기 어려운 문화적 암흑시대가 도래한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들이 무료로 안방을 찾아든 것입니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준비했던 공연 일정을 취소하는 대신 디지털 콘서트홀을 무료로 활짝 열어 주었습니다. 누구든지 인터넷 홈페이지(www.digitalconcerthall.com)를 열어 자신의 이메일 주소만 입력하면 간단히 회원으로 가입되어 한 달 동안 무료 공연을 즐길 수 있습니다.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 600여 편의 공연 영상이 공개되고 있습니다.

베를린 필만이 아닙니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도 매일 공연 한 편을 무료로 공개한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 빈 국립오페라단, 독일 바이에른 국립오페라단도 온라인 무료 공연에 합류했습니다. 국내 예술의전당, 국립국악원도 홈페이지와 유튜브 등을 통해 온라인 무료 서비스에 나섰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온 세계가 사회적 거리두기, 고독의 공포에 휩싸인 이 고통의 시기에 고맙게도 문화단체들이 다투어 세계 시민들에게 무료 공연의 은혜를 베풀고 있습니다.

이 위태로운 시기에 병구완을 자청해 병상으로 달려가는 아름다운 발길이 이어졌습니다. 위로의 엽서를 띄우고, 성금을 모으는 따뜻한 손길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국내외 유수의 예술·문화단체들이 외로움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세계 시민들에게 예술의 향기, 문화의 온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시련이 인내와 극기의 정신을 기른다고 하지요. 정말 이 봄 시련의 비를 뿌려 이 땅에 인내와 극기, 배려와 사랑의 싹을 돋게 하려는 뜻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일은 이탈리아 밀라노 출신 리카르도 샤이(Riccardo Chailly)의 지휘로 햇살같이 밝고 경쾌한 멘델스존의 4번 교향곡 ‘이탈리안’을 들어볼 참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발원지 중국보다 더 혹심한 고초를 겪고 있는 이탈리아 시민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마음으로.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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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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