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보틀(Blue Bottle) 단상 [박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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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보틀(Blue Bottle) 단상

2020.03.30

10여 년 전이었습니다. 지금은 음대에 들어간 딸아이가 주말마다 샌프란시스코 콘서바토리로 피아노를 배우러 다닐 때, 필자가 자주 찾은 카페가 블루 보틀(bluebottle)이었습니다. 블루 보틀이라는 이름은 1600년대 말, 최초로 문을 연 유럽의 카페 이름을 빌려 온 거라고 합니다. 샌프란시스코 컨서바토리를 끼고 돌아 두 블록 정도 골목으로 들어가면 주택가에 작은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카페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블루 보틀이었습니다. 말이 카페지 앉을 자리 하나 없이 테이크 아웃만 가능한 허름한 곳이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반려견을 위한 과자를 무료로 비치해 놨는데 처음에는 반려견과 같이 산책을 나와 커피를 마시라는 유인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장사가 너무 잘되는 것이었습니다. 언제나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했는데, 아마, 애완견 스낵은 줄을 서서 기다릴 때, 지루해할 반려견을 위한 배려였던 것 같습니다.

필자의 기억에 블루 보틀은 늦게 오픈해서 일찍 닫았습니다. 당시 스타벅스나 피츠커피(Peet’s coffee)같은 유명한 체인점들은 늦어도 아침 7시에는 문을 열어 모닝커피를 찾는 손님들을 맞이했는데, 블루 보틀은 전혀 부지런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나는 돈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나는 내가 일하고 싶을 때 일할 거고, 내가 즐겁게 일해야 맛 좋은 커피가 나올 수 있어. 그러니 당신들이 내 시간에 맞춰서 커피를 마셔줘.” 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매일 길게 줄을 서는 불편함을 감수했습니다. 필자가 그 당시 판단하기에도 블루 보틀의 카페라테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맛이었습니다. 가격은 3.5달러 정도로 적당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블루 보틀 커피를 꼬박꼬박 챙겨 마시다 보니 재미있는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 맛에 익숙해지면서 처음 마실 때의 신선한 충격이 점점 잊히는 거였습니다. 게다가 커피의 맛이라는 것이 그날그날 여러 변수에 의해 미묘하게 차이가 나고, 또 그걸 마시는 사람의 컨디션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에, 어떤 날은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도 종종 생기게 됐습니다. 결국 몇 달이 지나자 “굳이 그렇게 오래 기다려서 먹어야 할까?”라는 회의가 생겼고, 그 이후 몇 달은 찾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가 어쩌다 우연히 마시게 되면, “역시, 이 맛이야!” 하며 다시 찾게 되었고, 또 그러다가 뜸해지는 것을 반복했던 것 같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필자가 살았던 팔로 앨토(Palo Alto)의 보더스(Borders)라는 책방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블루 보틀 카페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2,000만 달러의 투자를 받으면서 블루 보틀이 공격적으로 점포를 늘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후 일본에 이어 지난해엔 우리나라에 상륙했습니다. 성수동에 문을 연 1호점은 초기에는 뉴스에 보도될 정도로 손님으로 미어터졌습니다. 필자는 ‘저렇게 손님이 많은데 품질 관리가 잘 될까?’라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고 올해 초에 많이 기다리지 않고 성수동 블루 보틀의 커피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궁금증은 해소됐습니다. 사실 이미 지난해 초에 뉴욕을 방문했을 때, 73번가 근처의 블루 보틀 커피를 맛보고 한 번 실망했던 터라 그다지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 맛을 봤던 10여 년 전의 추억을 다시 소환할 수 있을까?’ 라는 소박한 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추억은 추억일 때 아름다운 법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얼마 전에 국내 일간지에 블루 보틀을 창업한 제임스 프리먼(James Freeman)의 인터뷰가 소개되었습니다. “내가 맛있다고 생각한 커피를 팔았더니 많은 사람이 좋아했다.” 라며 블루 보틀의 인기 비결을 얘기한 내용이었는데, 아마도 프리먼이 한국 매장에서는 커피를 마시지 않은 모양입니다. 하긴 요즘은 주로 집에서 커피를 즐긴다고 하니 예전에 필자가 샌프란시스코 골목에서 마셨던 맛있는 커피는 이제 프리먼의 집에 초대되어야만 맛을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조금 더 준비하고 조금 더 성의있는 모습으로 한국 고객을 만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커피 한 잔에 6,000원 안팎인데 그 돈에 맞는 공력은 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한국에 진출한 블루 보틀은 보면서 “우리는 잘나가는 커피 집이야, 모두 줄을 서서 우리를 영접하길 바라. 커피맛?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해? 어차피 당신들은 사진 찍으러 오는 거 아니었나?”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슬쩍 화가 납니다.

필자가 블루 보틀 커피를 맛있게 즐겼을 때와 지금의 블루 보틀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커피보다 자본의 냄새가 더 난다고 해야 할까요? 분명 더 멋진 장소에서 더 큰 규모로 커피를 내려서 팔고 있는데 감동은 없으니 아마도 대량화의 과정에서 열정이라는 정성적(定性的) 요인이 빠져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클라리넷 연주자였던 프리먼은 커피와 연주를 비교하면서, “연주나 커피나 매일 연습하면 조금씩 나아져요. 커피가 좀 더 유연하긴 하죠. 실수하면 다시 끓이면 되니까."라고 말을 했습니다. 창고에서 출발해서 SNS의 스타로 올라선 성공한 커피 체인점이 ‘실수를 인정하고 다시 끓일 것’ 같지는 않지만, 그 맛을 추억 속에만 묻어두기는 아까운 마음에 수상(殊常)한 시절에 아둔한 넋두리를 해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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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박상도

SBS 선임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
현재 SBS 12뉴스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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