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현충원을 찾아 마무리한 대전 생활 [허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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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을 찾아 마무리한 대전 생활

2020.03.16

최근 대전 유성에서 약 10년 생활을 정리하고 경기도의 한촌(閑村)으로 이사했습니다. 과거 멀리 옮겨 다녔던 경험이 부담스러워 그랬는지 살림이나 인연을 늘리지 않고 살려했지만 트럭을 꽉 채운 이삿짐에 무안해집니다. 서울의 경제연구소에서 충남대로 옮긴 후 외부 활동을 크게 줄인 덕에 사람들 인연은 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강아지와 고양이가 새 가족이 되었으니 연(緣)이 줄었다 할 수 없습니다. 연이 너무 쌓이면 삶의 짐이 버겨워져 생을 내려놓는다하는 말에 새로운 연을 피하려 해도 귀한 연이 생기는 것을 보면 어느 신이 관장하는지 몰라도 참 오묘한 일입니다. 오래 미루었던 과거 지인의 묘를 찾으며 대전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이달 초 대전현충원에 가서 2009년에 근무하던 연구원에서 심장마비로 작고한 예비역 육군대령 김동수 박사의 묘를 찾았습니다. 한 일간지의 부고 기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았습니다. “... 국내 육상무기 분야의 최고 권위자다. ... K-9 자주포 개발을 주도해 사거리와 발사속도, 기동성에서 선진국의 자주포와 맞먹는 성능을 가진 명품무기를 탄생시켰다.” 다른 신문은 고인이 무기 개발뿐만 아니라 이를 수출하는 데에도 주역이었다고 소개했습니다.

그를 1980년대 중반 대학원 박사과정 학생으로 미국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는 유일한 현역 군인 유학생이었는데, 당시 신군부 장군 출신들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때여서 군인에 대한 인식이 썩 좋지 않았던 때입니다. 하지만 가족을 동반한 유학생의 경우 아이 이름을 따 부르는 호칭법에 따라 ‘상만 아빠’였던 그는 성격이 밝고 적극적이어서 다른 한국 대학원생들과 잘 어울려 지냈지요. 육사 재학시절 축구선수로도 활약했던 그는 활달했습니다. 공학도였던 그와 전공이 다른 필자는 처음에는 접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워킹맘(working mom) 엄마와 논문 준비가 한창이던 필자가 어린 딸애 맏길 곳을 못 찾아 전전긍긍할 때 상만 엄마의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온화한 보살핌 덕에 아침에 밝게 기혼 학생 아파트의 상만네 집에 들어서는 애를 보며 고마운 마음이 컸고 상만 아빠도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 좋은 그와 필자 사이가 그저 좋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발단은 당시 미국을 떠들썩하게 한 이란-콘트라 사건이었습니다. 카터 대통령 재임시절 신성국가로 전환한 이란이 테헤란 주재 미대사관 근무자들을 감금했던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이란은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런 나라에 미국이 무기를 불법적으로 판매하고, 그 이익으로 니카라과의 좌파정부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던 콘트라 반군을 지원한 것이 드러나 불거진 큰 정치 스캔들입니다. 사건 초기 의회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거기서 국가안보실에 근무하며 이 음모의 실무를 담당했던 올리버 노스 해병 중령이 증인으로 나와 뭐가 잘 못이냐고 당당히 증언해 언론을 도배했습니다. 이 일이 화제가 되었고 노스를 두둔하는 상만 아빠의 입장에 그 사건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필자는 발끈하여 언쟁을 벌였습니다. 무엇이 국가의 이익이고 이를 어떻게 달성해야 하는가에 대한 시각차가 있음을 확인한 것이죠.

1989년 중반 학위과정을 끝내고 샌프란시스코에 직장을 잡아 이사한 후 필자가 김동수 박사를 다시 본 것은 다음 해였습니다. 그는 박사과정을 고속으로 마치고 캘리포니아 몬테레이에 위치한 해군국방대학원에서 조교수로 강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육사를 거쳐 서울대 공대를 졸업한 그의 명석함을 지도교수가 인정해 필자와 비슷한 시기에 학위를 마치고 해군대학원에 자리를 알선해주었습니다. 두 가족들 모두에게 반가운 재회였습니다. 아마 그에게는 빨리 귀국하는 것이 군 경력 관리에는 도움이 되었겠지만 지도교수와의 공동연구, 그리고 그동안 어려움도 겪었을 가족들을 좋은 환경에서 지내게 하고 싶은 배려도 작용했던 결정이었습니다.

고급 휴양지 같은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한 학교에서 그의 연구실을 보았습니다. 지금도 생생한 것은 한쪽 벽에 걸려 있던 중령 견장이 달린 짙은 초록색의 육군 정장 군복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보통 평상복 차림이었기 때문에 그 정복은 학교의 학생과 다른 교수들에게 자신이 대한민국 현역 육군 장교임을 알리는 깃발과도 같은 것이라고 웃으며 설명하는 그가 자랑스러웠습니다.

다음 그를 본 것은 1990년대 후반 일 때문에 잠시 한국에 왔을 때였습니다. 몬테레이에서 보았을 때와 많이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과로한 얼굴뿐만 아니라 한쪽 손이 많이 상해 있었습니다. 자주포 개발과정에서 사고로 손가락이 절단되는 부상을 겪었습니다. 사무실 책상머리에서 설계하는 수준을 넘어 세세한 부분까지 직접 관여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필자가 대전으로 옮기기 반년 전 2009년 여름, 타지에서 우연히 김박사의 부고 기사를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볼 날이 많을 것이라 생각하고 2000년부터 서울에서 지낼 때 찾아 만나지 않았던 것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에 재직하던 그가 생전 충남대에서도 강의를 했다고 하니 살아 있었다면 20여 년 각자 먼 길을 돌아 같은 학교 교정에서 다시 만나 깔깔거리며 못 보았던 기간을 복기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 더 안타깝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어쩌다 대전현충원에 접한 길을 지날 때면 마음의 빚의 무게를 느꼈습니다. 지인들을 통해 그의 가족들이 잘 지낸다는 말을 듣고는 그나마 위안이 되었습니다.

이사 며칠 전 날이 차나 햇빛이 맑은 날 대전현충원을 찾았습니다. 가까이에는 낮은 소나무 언덕과 멀리는 산으로 둘러싸인, 잘 정리된 묘역에서 그의 묘를 찾았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필자에게 김동수 박사의 삶은 과거에 너무 흔히 듣던 멸사봉공(滅私奉公)의 표본입니다. 그곳에 묻혀있는 다른 이들은 어떤 안타까운 사연들을 품고 있을까 생각하니 더 숙연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오는 길에 새 집에는 뜰이 좀 있으니 수국을 키워 다음 올 때는 조화 대신 생화를 가져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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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허찬국

1989년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후 미국 연지준과 국내 민간경제연구소에서 각각 십년 넘게 근무했고, 2010년부터 2019년 초까지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로 재직. 다양한 국내외 경제 현상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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