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이 더 컸던 추사전 [임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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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이 더 컸던 추사전

2020.03.13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린 ‘추사 김정희와 청조(淸朝)문인의 대화’ 전시회가 한 달여 만에 중단됐습니다. 예술의전당, 과천시, 예산군,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가 공동 주최한 전시는 원래 1월 18일부터 3월 15일까지 열리게 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2월 25일부터 문을 닫아 재개장이 어려운 상태로 날짜가 다 가버렸습니다. 지난해 6월 18일~8월 23일 중국 베이징에서 같은 이름으로 열린 전시의 귀국 보고전 성격이었는데,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더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우선 전시작이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추사라면 맨 먼저 떠오르는 ‘세한도’(국보 제180호)가 없었습니다. 세한도를 본 청나라 문인들은 앞다투어 제영(題詠,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읊은 시)을 썼는데, 이거야말로 가장 확실한 ‘추사와 청조문인의 대화’ 아니겠습니까? 소장처와 대여 합의가 안 된 탓이겠지만, 진품이 아니라도 이 작품이 없으면 전시의 격이 크게 달라집니다. 제작 경위, 세한도와 청나라 문인들, 일본으로 넘어갔던 세한도가 돌아오는 과정만으로도 멋진 전시 하나를 기획할 수 있습니다. 추사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대련(對聯)도 없었습니다.

그런 명작들이 없는 반면 추사 작품인지 의심스러운 ‘자신불(自身佛, 현세에 있는 몸이 그대로 부처가 됨)’이나 위작 시비 때문에 문화재위원회에서 보물 지정이 보류된 것들, 추사의 작품을 소장했거나 추사에게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는 현대 작가들의 그림과 조각품은 있었습니다. 이런 끼워 넣기는 전시의 순수성을 해치고 기획 의도를 의심케 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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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작은 세 섹션으로 구분됩니다. 첫 섹션 ‘연행(燕行)과 학예일치’는 ‘효렴 이(孝廉 二, 세로글씨 기준)’로 시작됩니다. 추사 작품 ‘임군거효렴경명(臨君擧孝廉鏡銘)’중 ‘효렴(孝廉)'에다'고천(高遷)’의 ‘高’ 머리 부분만 따온 ‘二’를 붙여 만든 건데, 의미도 없고 얼토당토않은 해체와 왜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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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한 번 전시를 했는데도 이 정도밖에 안 되나 하는 의심이 생길 만큼 해설문에도 오자 오류가 많았습니다. 한 단어를 한자의 번체와 간체자로 엇갈리게 써놓거나 같은 말을 서로 다르게 표기한 곳도 있었습니다. 추사의 연보에는 완원(阮元, 1764~1849)의 사망 사실이 나오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추사의 스승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은 언제 죽었는지 표기돼 있지 않습니다. 체계적이지 못합니다.

띄어쓰기 잘못은 다 제쳐두고 중요한 오류만 지적하면 이렇습니다. 하나의 기치를 내세운데--->내세우는데, 해천의 입립자--->일립자(一笠者), 오하소전파공--->오하소전파공진상(吳下所傳坡公眞像), 여침동암(與沈桐庵)--->여심동암, 잡저(雜識)--->잡지. 잡지는 여러 가지 일에 관한 미셀러니 성격의 기록을 말함. 근원을 거슬리지 않으면--->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경주무장비(慶州藏寺碑)--->경주무장사비(慶州武藏寺碑), 漢攷古證今(한고고증금)--->攷古證今. 漢을 빼야. 한 가지 근원을 둘로 나뉘지 말아야--->나누지, 황정경해(黃淸經解)--->황청경해, 가장 이채를 때고 있는--->띠고 있는, 서도(西道)--->서도(書道).

전시를 보고 며칠 후, 위에 열거한 잘못을 중심으로 고쳐야 할 것을 예술의전당의 웹마스터 메일로 써 보냈습니다. 누군가 읽긴 했는데 아무 반응이 없기에 열흘쯤 지난 뒤 전화로 담당 부서의 메일 주소를 알아내 같은 메일을 보냈습니다. 전화를 받은 여성은 이름을 밝히면서 상냥하게 응대했지만, 이번에도 메일을 읽기만 하고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사실은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전시든 오자 오류를 알려주었을 때 바로잡는 경우를 본 적이 없거든요.

중국의 추사전은 모두 30만 명이 관람했다고 합니다. 북한의 만수대 창작사 소속 작가들도 와서 보고 갔다지요? 그래서 우리도 그런 성황을 기대했나 본데, 서울 관람객은 5,000명을 갓 넘은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습니다. 코로나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시 수준이 실망스러운 탓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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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월 16일부터 2월 24일까지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에서는 ‘안진경(顏眞卿, 709~785) 특별전’이 열렸습니다. 안진경을 중심으로 당나라 이후 서예를 조명한 대규모 전시는 안팎의 큰 관심을 끌어 우리나라에서도 비행기를 타고 가 관람한 서예가들이 많습니다. 그런 서예가 중 한 분은 잘 짜인 전시 기획의 내공과, 몇 시간이고 줄 서서 기다려 관람하는 일본 젊은이들을 보며 절망을 느끼고 왔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한자 푸대접, 서예 무대접’ 문화풍토를 함께 절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서예가들의 꿈은 추사를 뛰어넘고 완당을 능가하는 ‘월추사 능완당’(越秋史 凌阮堂, 내가 만든 말입니다)입니다. 추사전이 그런 바람을 키워주면서 서예 진흥에 기여하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서예가들의 절망에 큰 실망을 얹은 꼴이 됐습니다. 원래 이번 전시는 서울에 이어 추사의 연고지인 충남 예산과 경기도 과천, 제주에서 잇따라 열기로 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때문에 그 일정도 불투명해졌습니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실망과 한탄과 아쉬움이 큽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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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철순(任喆淳)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 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 한국기자상, 위암 장지연상, 삼성언론상 등 수상. 저서‘노래도 늙는구나’, '효자손으로도 때리지 말라’,’손들지 않는 기자들‘,‘1개월 인턴기자와 40년 저널리스트가 만나다(전자책)’,‘내가 지키는 글쓰기 원칙(공저)’'마르지 않는 붓'(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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