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의 도가니'에 빠진 봉준호표 위트


[터치! 코리아] '충격의 도가니'에 빠진 봉준호표 위트

탁월한 위트로 세계무대 휘어잡은 봉준호 감독
'청와대 오찬'에선 오히려 네티즌의 촌철 위트가 빛났다

 

김윤덕 문화부장

잘생긴 남자, 똑똑한 남자는 세상에 널렸어도 위트 있는 남자는 드물다. 위트란 여유와 지력, 자신감을 모두 갖췄을 때만 구사할 수 있는 고난도 인격이기 때문이다. 유머는 그저 웃기지만, 위트엔 촌철이 있다. '티끌 모아 봐야 티끌' '성공의 비결은 1% 재능과 99%의 빽' 같은 우스개처럼 세태를 풍자한다. 위트남(男)이 소통에 실패하지 않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봉준호 감독은 영리한 남자다. "계급투쟁을 호러와 풍자로 버무린 현대판 우화로 세계 일류 감독으로 도약했다"는 뉴욕타임스의 상찬처럼, 영화 '기생충'은 봉준호 특유의 위트와 유머로 예술과 오락을 다 잡은 코미디 스릴러다. 그 유명한 "1인치 장벽" "오스카는 로컬!"뿐 아니라 평소에도 위트가 넘친다. 마블 같은 영웅물을 만들 생각 없느냐는 질문엔 이렇게 답했다. "몸에 딱 붙는 옷 입는 걸 못 견딘다. 마음이 막 질식하는 것 같아서. 음… 가죽옷 말고 펑퍼짐한 의상을 입는 영웅이 있다면 시도해 보겠다."

 


한데 이 탁월한 봉준호표 위트가 청와대 식탁에선 빛을 보지 못한 모양이다. 김정숙 여사가 직접 장 봐 요리했다는 '돼지목심을 얹은 짜파구리'에 말문이 막혔을까. 그래도 7분간 이어졌다는 대통령 찬사에 봉 감독이 내놓은 답변은 의외다. "대통령님 말씀하시는 걸 보면서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는 그는 "저도 한 스피치 하지만 너무나 조리 있게 또 정연한 논리적인 흐름과 완벽한 어휘의 선택을 하시면서 기승전결로 마무리하시는 걸 보고 충격에 빠졌다"고 화답했다.

그로 인한 파안대소로 '충격의 도가니'에 빠진 건 국민이다. 오찬 한 날이 코로나 확진자가 눈덩이처럼 불고 첫 사망자까지 나와 나라 전체가 패닉에 빠진 날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봉 감독이 감탄한 "대통령님의 논리정연한 스피치" 때문이다. "기생충이 보여준 사회의식에 깊이 공감한다"는 대통령은 "불평등 해소를 최고의 국정 목표로 삼았는데, 반대도 많고 성과가 나지 않아 애가 탄다"고 했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은 기회의 불평등과 과정의 불공정을 온몸으로 보여준 조국 전 장관을 떠올렸다. 로이터통신마저 "한국 사회 불평등을 반영한 '기생충'은 조국 스캔들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조 장관 사퇴에 "마음의 빚을 졌다"며 안타까워한 대통령과 한국의 반지하 풍경으로 불평등의 민낯을 세계에 보여준 감독이 한자리에서 웃는 모습은 기묘했다.



'권력과의 오찬'에 날 선 위트를 쏟아낸 건 오히려 네티즌들이다. "(기생충) 박 사장네 막내아들 생일파티 장면과 닮았네" "폭우로 반지하엔 물난리가 났는데 공기 좋아졌다고 웃는 부잣집 사람들!" "당신들은 맛보기로 (짜파구리) 먹지만 국민들은 살려고 먹어요. 그마저도 대구는 동나서 못 삽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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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오찬의 성과가 있다면 "영화 산업의 융성을 위해 확실히 지원하겠다"는 대통령 약속이다. 봉준호는 우뚝 섰지만 한국 영화 100년의 현실은 참담하다. 수출 실적은 매년 뒷걸음질치고 작품의 질도 바닥을 치고 있다. 한 평론가는 "저변의 창작자들이 영화 한 편 만들려면 CJ, 쇼박스를 찾아가 영혼을 팔아야 하는 현실에서 '포스트 봉준호'가 나올 토양은 기대할 수 없다"고 개탄했다. 영화계 큰손 이미경 CJ 부회장이 할리우드 종사자들 환호 속에 아카데미 마이크를 잡은 모습과 교차하는 대목이다.

 


'오찬 소동' 이후 봉 감독은 코로나와 전쟁 중인 고향 대구에 1억을 기부했지만, 기생충 팀이 선물한 '눈가리개'를 쓰고 재밌어하는 김 여사의 모습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쇠고기는 느끼할까 봐 돼지고기와 대파를 얹었다"는 그 유쾌한 목소리도 함께.
김윤덕 문화부장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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