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 월성 원전 올스톱 된다"


지지부진한 공론화委… 이러다 월성 원전 올스톱 된다"

 

[핵폐기물 저장률 94%… 원안위 증설 결정에도 공사 시작 못해]
보관소 짓는데 최소 22개월인데 내년 11월이면 완전 포화 상태 "지금 당장 첫삽 떠도 늦어" 공론화재검토委 대부분 비전문가 결석률 32%… "정부 눈치만"



    20일 오후, 경주 월성 원자력 본부. 입구에서 월성 원전 1~4호기를 지나자, 거대한 '금고'같이 생긴 맥스터(사용후핵연료 건식 저장 시설)가 터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높이 7.6m, 면적 282㎡에 이르는 조립 블록 형태의 맥스터 1기마다 사용후핵연료 2만4000다발을 저장할 수 있다. 월성 원전 안에만 7기가 있다. 계단으로 맥스터 상부에 오르자 거미줄처럼 얽힌 쇠파이프, 철사가 눈에 들어왔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이미 포화된 맥스터를 봉인한 징표였다. 기자가 입은 노란 방호복 주머니에 들어 있는 ADR(휴대용 방사선 측정기)에는 '0'이란 수치가 표시돼 있었다. 방사선 피폭 우려가 전혀 없다는 의미다.

경북 경주에 위치한 월성 원자력 본부 모습. 둥근 지붕의 건축물이 원전으로, 오른쪽부터 월성 1~4호기다. 사용후핵연료를 보관하는 맥스터(건식저장시설)를 시급히 증설하지 않으면 내년 11월부터 현재 가동 중인 월성 2~4호기의 가동이 중단될 위기다. 원자력안전의 최고 기구인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이달 들어 맥스터 증설을 승인했으나, 재검토위원회라는 공론화 과정에 막혀 증설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월성 원자력 본부


월성 원전에서 나오는 사용후핵연료를 저장하는 맥스터가 포화 직전이어서, 1년 10개월 후엔 원전 가동을 중단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지난 10일 월성 원전 내 맥스터 7기 추가 증설을 승인했으나, 공론화 작업이란 또 다른 큰 산을 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용후핵연료 처리 문제처럼 사회적 갈등 요인이 큰 사안에 대해선 다양한 의견을 모으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정작 이 작업을 주도해야 할 사용후핵연료 관리 정책 재검토위원회(이하 재검토위)는 출석률이 낮아 주민들에게 '해결 의지가 없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원전 업계와 지역사회에선 "재검토위가 탈(脫)원전 정책을 밀어붙이는 정부 눈치를 보느라 미적거리고 있어서 멀쩡한 원전이 문을 닫을 위기"라는 비판이 나온다.

지금 첫 삽 떠도 늦는다
2019년 12월 기준, 월성 원전 사용후핵연료 저장률은 94.18%다. 월성 원전은 원전 내 습식 저장조와 원전 외부 건식 저장 시설인 맥스터가 내년 11월에 모두 찰 것으로 예상한다. 중수로 원전인 월성 2~4호는 천연 우라늄을 쓰기 때문에 농축우라늄을 원료로 하는 경수로 원전보다 사용후핵연료가 훨씬 많이 나온다. 국내 원전 단지 5곳(월성·고리·새울·한빛·한울) 중 중수로 원전이 있는 곳은 월성이 유일하다.


과거 건식 저장 시설인 캐니스터 300기(사용후핵연료 총 16만2000다발)는 이미 2010년 포화해 수명이 다했다. 2009년 완공된 맥스터 7기도 현재 6기는 사용후핵연료로 꽉 찼고 남은 1기 일부만 여유가 있다. 빼곡히 들어찬 캐니스터·맥스터 한쪽으로 넓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사용후핵연료 저장 포화를 예상해 맥스터 추가 증설을 하려고 닦아놓은 부지였다. 맥스터 증설에 필요한 시간은 실제 건축 기간, 각종 인허가 절차를 감안해 22개월 정도다. 한 원자력계 관계자는 "산술적으로만 따지면 지금 당장 첫 삽을 떠도 내년 11월까지 공기를 맞추는게 쉽지 않다"고 말했다.

 


제 역할 못 하는 재검토위
맥스터를 지으려면 최종적으로 사용후핵연료 관리 정책 재검토위의 허가가 필요하다. 재검토위는 지난해 5월 출범했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 7월 당시 공론화위원회가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관리 기본 계획'을 수립했지만, 문재인 정부가 '사용후핵연료 재(再)공론화' 방침을 밝혔고 이에 따라 재검토위가 새로 구성됐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원전 업계와 시민 단체 등을 배제하고 변호사와 행정학·통계학 등을 전공한 대학교수 등 15명을 재검토위 위원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재검토위가 제대로 논의를 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검토위 16차례 회의록을 살펴본 결과, 위원 결석률이 32.5%나 됐다. 격주로 열리는 회의에서 적어도 전체 위원 15명 가운데 5명은 빠졌다는 얘기다. 16회 회의 중 절반 이상 불참한 위원도 4명이나 됐다.

송종순 조선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재검토위가 원전 비(非)전문가들로 구성되다 보니 전문성이 필요한 사안의 공론화 작업이 더디다"며 "중간 저장 시설·영구 처분 시설 등 장기적 의제와 별개로 시급한 맥스터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용후핵연료를 보관하는 건식 저장 시설인 '맥스터'(왼쪽 직육면체 건물)와 '캐니스터'(오른쪽 원통형 설비). 사진 아래쪽에 텅 비어 있는 공간은 저장 시설을 추가 건설하기 위해 마련한 부지다. /월성 원자력 본부

 


최악은 원전 가동 중단
내년 11월까지 사용후핵연료를 저장할 공간을 마련하지 못하면 최악일 경우 월성 2~4호기 가동을 중단해야 한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 몫이다. 2018년 기준, 월성 2~4호기가 생산한 전력(1만3600GWh)은 대구·경북 전체 전력 소비량(6만1600GWh)의 22%였다. 원전 가동을 멈추면 그만큼 LNG(액화천연가스)나 석탄발전소를 더 돌려야 한다. 원전에 비해 발전 단가도 비싸고, 미세 먼지 배출도 훨씬 많아진다.

지역 경제도 큰 타격이 우려된다. 월성 원전 본부는 2018년 경주시에 지역 지원 사업비(기본 지원, 사업자 지원)로 150억원, 지방세로 409억원을 냈다. 지방세만 따져도 경주시 전체 세수의 20% 정도를 차지한다.

월성 원전 인근 감포읍의 최학렬 주민자치위원장은 "촌각을 다투는 문제인 만큼 재검토위는 공론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이순흥 기자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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