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룸 공화국'


아파트 공화국 아래 '원룸 공화국'이 있습니다


예비 대학생 집 구하는 1~2월은 원룸족 이사철


    거대한 '아파트 공화국' 대한민국의 표피 아래엔 미생들의 '원룸 공화국'이 웅크리고 있다. 세 집 중 한 집꼴인 1인 가구(전체 가구 중 29.3%, 국토부 2018년 인구주택총조사) 상당수가 원룸에 산다.


1~2월은 원룸 공화국의 지각판이 움직이는 시기. 예비 대학생들의 원룸 수요가 몰리면서 연쇄적으로 직장인 원룸족 이동도 늘어난다. 방 하나에 기댄 삶을 들여다봤다.


캠퍼스 잡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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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94, 원룸의 등장

몇 해 전 인기 끈 드라마 '응답하라 1994'는 1990년대 중반 신촌 하숙집이 배경이었다. 그 시절 현실의 신촌 하숙촌에 '전입신고'한 새로운 주거 형태가 있다. 원룸(one room)이다. 왠지 고단함이 묻어나는 하숙(下宿)과 자취(自炊) 사이로 등장한 미끈한 세단이랄까. 단어 그대로 방 하나에 싱크대와 화장실이 딸린 형태였다.


"지방 학생의 꿈이었어요. 깨끗한 신축 건물, 혼자 쓰는 욕실…. 10평에 전세 3000만원 정도였으니 비쌌죠. 경제적으로 제일 여유 있는 지방 학생 극소수가 아파트에 살았고, 다음이 원룸이었어요. 그 밖에 기숙사, 독방 하숙, 합방 하숙(룸메이트와 방을 나눠 쓰는 하숙)이 있었고요." 1990년대 중반 신촌에서 대학 생활을 한 이수현(43·직장인)씨가 회상했다.


개인화의 시작을 알린 X세대 가치관과 맞물려 원룸은 대학가를 파고들었다. 본지에 처음 원룸이란 단어가 등장한 날짜는 1994년 5월 31일. '원룸 주택 인기'라는 제목의 기사엔 중소 주택 업체와 대기업까지 뛰어들어 연희·혜화·합정·서교동 일대에 원룸 임대주택을 건립한다는 내용이 실렸다.




원룸은 원룸이 아니다?

외래어로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렸지만 일본식 조어(造語)다. 영미권에선 '스튜디오(studio)'라고 한다. 일본에선 방 하나짜리 주거를 '1R(원룸)', 여기에 작은 부엌이 분리돼 있으면 '1K(키친)', 식탁을 놓을 부엌이 있으면 '1DK(다이닝룸·키친)'라고 한다. 표준 발음도 없다. 2015년 국립국어원 '대도시 지역 사회 방언 조사'를 보면 16~25세는 '[월룸]', 26~35세는 '[원룸]', 36세 이상에선 '[원눔]'으로 발음하는 경향이 강했다.


주변에 온통 원룸족이다. 두 달 전 서울 안암동에 8평짜리 원룸을 계약한 오승환(26·고려대 대학원)씨는 "혼자 사는 친구 중 80% 정도가 원룸에 산다. 하숙하는 친구는 거의 없다"고 했다. 그 많다는 원룸족이 통계엔 안 잡힌다. 함영진 '직방' 빅데이터랩장은 "원룸은 건축법상 정식 용어가 아니다. 다세대주택, 다가구주택, 오피스텔 등에서 방이 하나 있으면 원룸, 방이 둘 있으면 투룸으로 부른다. 정식 용어가 아니기 때문에 국토부 통계로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원룸족 몰리는 신림동

2030 싱글족 활동지를 거점으로 원룸이 확산했다. 서울 신촌·홍대 대학가, 강남 오피스가, 신림동 고시촌, 노량진 학원가 등이 대표적 원룸 거점. 부동산 플랫폼 '다방' '직방'에 의뢰해 각각 1월 현재 서울의 동별 원룸 이용자 조회 수를 산출한 결과 1위는 신림동이었다. 신림동에서 20년 가까이 영업한 예림공인중개사사무소 김남영 대표는 "1990년대 중반 서울대 앞 신림2동(현 서림동), 신림9동(현 대학동)에 허름한 하숙집이 많았다. 화재가 잦아 정부에서 저리 대출 지원을 해줘 5~6층짜리 원룸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2호선 라인이라 강남권 이동이 편하고 구로 가산 디지털단지 쪽으로도 가까운데 가격은 강남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 아직도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30만원이 있을 정도로 싸서 많이들 찾는다"고 했다.


최근 3년간 신촌, 영등포, 강남으로 원룸을 옮겨 다닌 직장인 김병준(가명·30)씨는 "몇 해 전만 해도 직장인들이 교통이 편리하면서 상대적으로 가격이 낮은 영등포, 당산, 동작 지역 원룸에 몰렸는데 지금은 이 지역도 가격이 올라 강남과 비슷해졌다"고 했다.


박성민 '다방' 마케팅 총괄 본부장은 "2019년 12월 기준 서울의 전용면적 10평(33㎡) 이하 원룸 평균 가격은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53만원이지만 양극화 현상이 있다"고 했다. "청담동에 전세 4억원짜리 원룸이 있는가 하면 서울 도심에 전세 6000만원짜리 원룸도 있어요. 강남, 송파에 있는 풀옵션형 복층 오피스텔 전·월세 가격은 강북 20평형 아파트와 비슷해요."


잠만 자는 곳? 삶을 사는 곳

원룸이 진화하는 사이, 원룸에 사는 세대도 X세대에서 밀레니얼 세대로 바뀌었다. "5~6년 전만 해도 원룸은 잠만 자는 곳이라 생각했어요. 가격이 제일 중요했어요. 가장 싼 반지하가 제일 먼저 빠졌어요. 요즘은 무조건 예쁜 집 우선이에요. 남녀 똑같아요." 김남영 대표가 말했다.


1인 가구의 삶을 담은 에세이 '9평 반의 우주'를 펴낸 김슬(30) 작가는 "결혼 전 혼자 지내는 삶을 '임시 벙커'로 여겼는데 이젠 아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인생 2막을 위해 '적당히'와 '가성비'에 파묻히고 싶진 않았다"고 했다. "결혼 혼수 말고 제가 새로 정의한 혼수를 들이기로 했어요. '혼자 사는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수려한 물건'요." 5만원짜리 최저가 침대 매트리스 대신 120만원짜리 퀸 사이즈 매트리스를 들였다.


이현우(가명·30)씨는 '원룸 그루밍'이 취미다. 인테리어 공유 앱 '오늘의 집'에 원룸 동지들이 찍어 올린 사진을 참고해 집을 꾸민다. 매달 작은 소품을 하나라도 사야 직성이 풀린다. 홈파티용 대형 탁자, 잡지 가판대도 샀다. "취직 전 '지옥고(반지하·옥탑방·고시원)'를 전전하면서 취직하면 반드시 좋은 원룸을 구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김슬 작가는 '올(올리브영)세권', 이씨는 '스(스타벅스)세권'이 중요한 원룸 선택 기준이었다.


노량진에서 임대업을 하는 김정남(가명·63)씨는 "요즘은 에어컨, TV, 냉장고, 드럼 세탁기, 인덕션은 기본 옵션"이라며 "공기청정기나 제습기를 옵션으로 넣는 반지하 원룸, 스타일러 갖춘 신축 원룸도 있다"고 했다.


반려동물은 최근 2~3년 새 등장한 새로운 원룸 풍경. '다방' 관계자는 "앱에 반려동물 허용 여부 필터가 있는데 등록 원룸 중 32%가 허용한다"며 "2년 사이 3배 이상 늘었다"고 말했다. 한 공인중개사 대표는 "집주인 열에 아홉은 반려동물 기르는 걸 원하지 않는다. 일부 세입자는 몰래 기른다"고 했다. 반려동물이 물건이나 벽지를 훼손하면 복구 비용을 청구할 수 있다는 특약 사항을 계약에 넣기도 한다.





1인분의 공간, '단짠'의 연속

주택산업연구원 김덕례 주택정책연구실장은 "원룸은 정상적 주택으로 가기 전 단계이지 항구적 주거 공간은 아니다"라고 했다. "주택의 최저 주거 기준이 1인당 14㎡(약 4.2평)예요. 가족이 생기면 원룸을 적정한 거주로 볼 수 없어요."


김슬 작가는 "옷걸이와 같은 방에서 자고 싶지 않아" 원룸 대신 투룸을 선택했노라 고백했다. "이전 집은 공간이 협소해 침대 옆에 옷걸이를 바짝 붙여 뒀는데 옷걸이가 제가 누워 있는 쪽으로 쓰러져 큰일 날 뻔했어요." 옷걸이에 압사(?)하고 싶지는 않아 마포의 신축 원룸 대신 같은 가격으로 30년 된 언덕 위 투룸을 택했다. "덕분에 '힐(hill·언덕)세권'을 얻었지요. 인생의 '단짠(단맛·짠맛)'을 거듭한 끝에 나만의 우주에서 1인분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됐어요(웃음)."

김미리 기자 조선일보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1/10/202001100246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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