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 위 저승사자’ 블랙아이스 대책은


블랙아이스, 교량·터널 입구만이라도 열선 깔자



     '도로 위 저승사자’ 대책은
아스팔트에 얇게 얼음이 깔린 블랙아이스 상태의 도로는 일반 도로보다 14배, 눈길보다도 6배가량 더 미끄럽게 변한다. 운전자가 시속 30㎞로 달리더라도 어쩔 도리가 없다. 어느 구간이 블랙아이스 상태인지 눈으로 식별할 수 없어 방어운전도 큰 도움이 안 된다. 교통사고 소송 전문가인 한문철 변호사는 “저속으로 달리더라도 블랙아이스 구간에서 차가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당황한 운전자가 급브레이크를 밟을 수 밖에 없다”며 “이때 차량은 핸들 조작이 안되고 확 돌기 때문에 사고를 피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실제로 차량이 미끄러지면 운전자는 본능적으로 차량 진행 반대 방향으로 운전대 조작하는데 이렇게 되면 차체가 중심을 잃고 한바퀴 이상 돈다.

지난 14일 상주-영천 고속도로 구간에서 발생한 47중 추돌 사고 뿐만 아니라 2015년 1월 영종대교 106중 추돌 사고 등 최근 4년간 도로 결빙으로 인한 사고로 145명이 사망하고 8500여명이 다쳤다. 그런데도 한국도로공사나 정부는 운전자에게 안전운전·조심운전을 당부할 뿐이다.

 


눈길보다 6배가량 더 미끄러워반짝 관심에 정부 지원 대상 제외자동염수분사장치 등 안전 대책설치·유지 비용 만만찮아 발동동

4년간 도로 결빙 사고로 145명 사망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2015년 영종대교 대형 추돌 사고 이후 한국화학연구원·한국생산기술연구원·한국건설기술연구원·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등 4개 기관 연구진이 블랙아이스 대책 마련을 위한 연구를 진행했으나 정부의 연구비 지원 사업으로 선정되지 못했다. 당시 연구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중앙SUNDAY와의 통화에서 “1월에 연구에 착수해 최종 심사가 5~6월에 진행됐는데 초여름이 되니 블랙아이스 대책 연구에 대한 관심이 많이 줄었다”며 “겨울에만 한시적으로 반짝 관심을 받는게 아쉽다”고 했다. 2016년 한국도로공사는 ‘어는 비 예측 시스템’을 개발했으며, 2018년 고속도로 전 구간에서 예측 시스템을 가동한다고 발표했으나 말 뿐이었다. 도로교통연구원 관계자는 “기상청 데이터를 도로 노면 상황에 직접 적용하는 데 한계가 있어 시범적용 단계에서부터 문제가 돼 중단됐다”고 말했다.



‘도로 위의 저승사자’로 불리는 블랙아이스가 언제, 어디서 기다리고 있는지 운전자는 알 수 없다. 예측도 안 되고 대비책도 없어서다. 이에 따라 도로 안전 관련 전문가들은 “상습결빙지역 등 일부 구간만이라도 열선·자동염수분사장치 등 신속 대처가 가능한 방식을 적극 고려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열선이 실효성이나 고비용 등 문제가 있지만 블랙아이스가 많이 생기는 전국 200곳 중에서 특히 교량 부분 만이라도 (열선을) 까는 것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호근 대덕대 자동차학과 교수도 “다른 지역보다 보통 2~3도가 낮아지는 교량 등은 결빙 현상이 잦다”며 “최소한 200~300m 전방에 경고 표지판을 반드시 세워야 한다”고 했다.

이번 상주-영천 고속도로 사고에서도 10분 간격으로 달산1교(상행선)와 산호교(하행선)에서 각각 사고가 났다. 블랙아이스가 주로 지열이 닿지 않는 교량 구간과 그늘이 자주 생기는 터널 출입구 부근에 자주 생기는 것을 감안하면 최소한 이 구간만이라도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상주-영천 고속도로(93.9㎞)에는 열선이 없다. 자동염수분사장치는 29곳에 설치가 돼 있을 뿐이다. 이 고속도로 구간에는 험준한 산악지형을 통과하는 교량과 터널이 118개나 있다. 제설차 12대가 도로 전 구간을 담당한다. 운전자들은 국내에서 가장 비싼 요금 6700원(승용차 기준)을 내는 민자고속도로를 달리면서도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안전확보 문제는 돈과 결부돼 있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열선’과 ‘자동염수분사장치’ 등을 이용해 도로 결빙에 적극 대응하고 있긴 하나 초기 설치와 유지, 보수 등 관리비용이 만만치 않다. 울산광역시 남구청은 거마로(672.5m)와 봉월로(197m)에 2012~2013년에 총 8억원을 들여 열선을 설치했다. 김동수 남구청 건설과 주무관은 “겨울 시즌(3개월) 동안 열선 전기료로 3000만원의 예산이 책정돼 있다”며 “열선 설치 후 결빙 관련 사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4개월 1400만원 전기료 국가서 지원을”
김 주무관은 이어 “다른 지역에서도 열선 설치 요구가 잇따르지만 수억원이 들어가 장기 검토 사안으로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전북 부안군 상서면 통정리 우슬재 일대(906m)에서도 1월 말 완공을 목표로 열선 설치 작업이 막 시작됐다. 급커브 구간인 데다 북향이라 상습 결빙지역이다. 총 사업비는 6억원이 들어갔다. 왕복 2차선인 우슬재에는 열선 8개(1개당 25cm 반경을 녹임)가 들어가 있고 노면의 습도와 온도를 자동으로 감지해 작동하는 센서를 통해 작동한다. 김종길 부안군청 건설교통과 주무관은 “겨울 4개월 동안 대략 1400만원의 전기료를 예상하는데 빠듯한 지자체 예산을 감안하면 부담이 된다”며 “국가에서 지원됐으면 한다”고 했다. 2013년 일부 지자체는 도로에 설치된 열선이 자주 고장을 일으켜 유지·보수에 들어가는 비용이 문제가 되자 열선을 철거하기도 했다.

 


해외에서는 다양한 방식이 시도되고 있다. 미국 버지니아주에는 53m 높이의 윌슨 크릭 브리지 (Wilson Creek Bridge)가 있다. 다리 하부에는 거대한 공동구간이 마련돼 있다. 이곳의 공기층이 찬기를 막아 겨울철 블랙아이스가 생기지 않도록 한다. 또 미국 뉴욕시의 경우 45m 교량에 열선을 설치하고 온도를 4도로 유지한다. 핀란드는 열 난방 파이프를 주요 도로 밑에 묻어 놓는 ‘로드히팅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일본에서는 상습 결빙이 자주 일어나는 홋카이도 등에서 도로 곳곳에 ‘그루빙’(세로 홈이 파여 배수가 잘되고 마찰력을 증대하는 미끄럼 방지 설비) 시공을 적용하고 있다.

<블랙아이스 사고, 웬만해선 운전자 책임 면하기 힘들어 법적으로 불리>

2014년 12월 승용차에 부인과 아들을 태우고 도로를 달리던 A씨는 충북 청주시 인근 도로의 교량 위를 통과하다 빙판길에 미끄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차량은 도로 우측의 난간을 들이받은 후 교량에 설치돼 있던 차량용 방호 울타리까지 뚫고 나가 개천으로 추락했다. 이 사고로 A씨 일가족은 모두 숨졌다.

 


사고 전 내린 눈비로 노면은 얼어있는 상태였다. 유족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빙판길에 차량이 미끄러져 A씨가 불가항력적인 상황이었고, 방호 울타리를 튼튼하게 설치하지 않아 피해가 컸다는 이유에서였다.

법원은 국가의 책임을 일부 인정해 유족 측에 1억61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조사결과 방호울타리 연결 부분이 문제가 있어 차량의 충돌을 견딜 만큼 충분히 안전을 담보하지 못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법원은 모든 책임을 국가에만 묻지는 않았다. 운전자에게도 일부 사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당시 A씨는 시속 62㎞(제한속도는 60㎞)의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현행법상(도로교통법 제17, 19조) 빙판길에서는 제한속도의 50%로 감속하게 돼 있는데 이를 지키지 않은 A씨에게도 사고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블랙아이스 사고현장/경북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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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법원 판례는 이처럼 도로관리 주체의 관리 소홀이 명확하게 드러났을 때 책임을 묻고 있다. 또 운전자 역시 과속, 안전거리 미확보 등이 확인되면 일정 부분 과실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교통사고 소송 전문가인 한문철 변호사는 “블랙아이스 사건의 경우에는 구체적 사고나 상황에 따라 책임소재가 달라진다”며 “고속도로의 경우 통상 2시간마다 순찰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블랙아이스 구간이 확인됐거나, 신고가 들어왔는데도 늑장 대처를 한 것으로 드러나면 법적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만 한 변호사는 “블랙아이스는 (폭설과 달리) 갑자기 생겼다가 없어지기도 하는 등 관리 측면에서 완벽히 대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어, 단순히 사고 직전 염화칼슘을 뿌리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법적 책임을 모두 묻기는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고성표·김나윤 기자, 김여진 인턴기자 muzes@joongang.co.kr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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