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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로 본 2019년  [박종진]

2019.12.14

12월 8일 일요일, 일본에 거주하는 중국인 F씨는 새벽까지 일을 하고도 아침잠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이틀 전 금요일 도쿄 신주쿠(新宿)에 있는 한 서점에 고양이를 주제로 한 만년필이 출시되었기 때문입니다. 개점 시각에 딱 맞춰 문구코너로 달려갔지만 ‘러시안 블루’와 ‘스코티시 폴드’는 각각 150, 300자루나 나왔는데도 이미 다 팔리고 없었습니다. 약 한 달 전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흰색 뚜껑에 보라색 줄이 몸통에 있는 독일산 바이올렛-화이트 만년필이 선주문 예약만으로 매진돼 매장에 나가지도 못하고 다 팔린 것입니다.

만년필의 대유행이 다시 시작된 것일까요? 좋지 않은 소식도 있었습니다. 20년간 해마다 봄에 열리던 일본 미스코시(三越) 백화점의 ‘세계의 만년필 제(祭)’는 올해를 마지막으로 열리지 않게 되었고, 얼마 전 만년필 매장마저 문을 닫았습니다. 그런데 11월 23일 서울 충무아트센터에서 열린 ‘서울 펜쇼(Seoul Penshow)’엔 2010년 창설 이래 최대 인파가 몰렸습니다.

이런 상반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답은 여성들이었습니다. 고양이 만년필과 독일산 보라색 만년필 구입자 대부분이 여성들이었습니다. 이 트렌드를 반영하지 못한 미스코시의 ‘세계의 만년필 제(祭)’는 막을 내렸고, 이런 경향에 대비한 ‘서울 펜쇼’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경향의 중심엔 만년필과 멀어 보이는 SNS가 있었습니다. 특히 사진과 동영상 기반인 인스타그램의 역할이 컸습니다. 매일 매일 음식과 애완동물, 예쁜 만년필과 손 글씨 등의 사진이 올라오는데, 그 중심엔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여성들은 이미 만년필 세계에 새롭고 강력한 세력이 되었습니다. 만년필이 부활한 1980년대 중반부터 세계의 양대 기둥은 몽블랑 149와 펠리칸 M800이었습니다. 두 만년필의 무게는 약 32g과 28g이고 뚜껑을 꽂으면 깎지 않은 연필만큼 길어 여성들에겐 매우 불편했습니다. 여성들이 선택한 것은 보다 가볍고 연필(약 17cm)보다 짧은 만년필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화려한 오로라 옵티마(약 15.3cm, 22g)와 펠리칸 M600(약 15.4cm, 16.5g), 파이로트 캡리스 데시모(약 14cm, 21g) 등입니다.

11월 23일 한국인 H씨는 새벽부터 부지런히 만년필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만년필 동호인들이 모여 만년필과 잉크 등을 전시하고 교환, 매매하는 ‘펜쇼’에 참가하기 위해서입니다. 자동차로 치면 ‘모터쇼’ 같은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매년 봄과 가을 두 번 열리는데, 만년필은 물론 연필, 깃털 펜, 붓과 벼루, 원고지 등 종이류도 출품됩니다. 일본은 ‘도쿄(東京) 펜쇼’  ‘고베(神戶) 펜쇼’, 대만엔 ‘타이난(臺南) 펜쇼,’ 미국엔 보스턴 시카고 등 주요 도시마다 이 행사가 열립니다.

그는 한 달 전 ‘서울 펜쇼’ 운영위원장으로부터 여성들이 좋아할 만년필을 준비하라는 말을 듣고 가볍고 밝은 색상의 만년필로 트렁크를 채웠습니다. 펜쇼가 열리기 1시간 30분 전에 도착했는데, 행사장은 만년필 애호가들로 이미 꽉 차 있었습니다. 전혀 낯설지 않은 광경입니다. 4월의 봄 서울 펜쇼와 10월 초의 도쿄 펜쇼도 그러했습니다. 방금 도착한 일본인 N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H씨와 N씨는 구면(舊面)으로 올해만 세 번째 만남입니다.

2019년 만년필 세계의 특징은 여성들의 시대가 온 것, 동아시아 만년필 세계는 H씨와 N씨의 만남처럼 빠르게 뭉쳐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양이 만년필을 구하려던 중국인 F씨 역시 H씨와 친분이 있고 내년부터 ‘서울 펜쇼’에 참가할 예정입니다. 내년 봄 ‘서울 펜쇼’는 한중일의 대표 격인 H, F, N씨 같은 사람들이 ‘만년필의 새로운 지배자’ 여성들을 잡는 치열한 각축장이 될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새봄이 기다려지는 2019년의 겨울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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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박종진

1970년 서울 출생. 만년필연구소 소장. ‘서울 펜쇼’ 운영위원장.
저서: ‘만년필입니다’, ‘만년필 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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