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떠나는 기업들] 100년 기업 경방의 해외 탈출..."한국선 적폐"
100년 기업 경방도 생존 위한 탈출… 용인공장 통째로 뜯어 베트남으로
[고용 83% 떠맡는 中企가 신음한다]
한국 떠나는 기업들
中企 해외투자 올 18조 역대 최대
해외투자 5년새 13조9600억 늘때, 국내투자 13조4800억 감소
기업들 "現정부선 경영환경 개선 가망 없어… 해외서 재도전"
지난달 28일 오후 3시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면방직회사 경방 공장 정문. 목조 자재와 설비를 화물칸에 잔뜩 실은 10t짜리 트럭이 줄줄이 정문을 나오고 있었다. 트럭 행렬은 10분에 1대꼴로 이어졌다. 용인 공장에서 뜯어낸 자재와 장비를 베트남 공장으로 이전(移轉)하기 위한 작업이다. 일부 자재는 중국 등에 싼값에 팔려간다. 1919년 설립돼 올해 100년이 된 경방은 1956년 우리나라 증권거래소가 설립될 때 1호로 상장된 기업이다. 과거 한국 제조업의 상징이었던 경방의 용인 공장은 이렇게 통째로 뜯겨나가고 있었다. 공장은 이미 4개월 전 폐쇄됐다. 대부분 40대 이상인 생산직 직원 100여 명은 베트남으로 옮기거나 직장을 떠나야 했다.
용인공장 시설 옮기는 경방 - 지난달 28일 경기도 용인의 경방 용인공장에서 대형 트럭이 공장 안팎을 오가며 자재를 실어나르고 있다. 국내 1호 상장 기업인 경방은 8월 이 공장을 폐쇄하고, 자재와 설비를 뜯어 베트남 공장 등지로 이전하고 있다. /김지호 기자
중소기업이 해외로 떠나고 있다. 중소기업의 해외투자는 올해 150억달러(약 17조7990억원)를 돌파할 전망이다. 1980년 해당 통계를 집계한 이후 역대 최대다. 같은 기간 국내 설비투자는 급감했다. 올해 설비투자는 전년보다 5조원 이상 줄어든 19조8800억원에 그칠 전망이다. 중소기업의 해외 탈출은 고용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해외 공장이 정상 궤도에 오르면 한국 공장은 생산량이 크게 줄거나 폐쇄될 수밖에 없다. 1~2년 뒤 중기발(發) 고용 대란이 우려되는 것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국내에서 공장을 돌려서는 매출과 영업이익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한 중소기업이 해외로 떠나고 있다"며 "이들을 붙잡을 정부 정책이나 의지가 필요하지만, 현재로서는 위기의식조차 희박한 것 같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의 해외 탈출은 과거와 상황이 확연하게 다르다. 2000년대만 해도 사업 확장을 위한 진출이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희망을 찾지 못해 한국을 피하는 도피 성격이 강하다. 중소기업계에서 '엑소더스(exodus·대탈출)'라고 일컫는 이유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우리가 한국을 버린 게 아니라, 우리가 버림받은 것이다. 사실상 쫓겨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12일 본지가 한국수출입은행과 한국산업은행의 통계를 비교한 결과, 올 상반기 중소기업의 해외투자 금액은 75억5500만달러로 작년보다 70% 증가했다. 중기의 해외투자는 최근 5년 새 매년 2조~4조원씩 뛰고 있다. 반면 중기의 국내 설비투자는 5년 전 33조원대에서 매년 2조~5조원씩 줄고 있다. 2014년과 비교하면 중기의 해외투자는 13조9600억원 늘었고, 국내 설비투자는 13조4800억원 감소했다. 중소기업들이 국내에서 쓰던 돈을 고스란히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해외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현재 추세라면 내년엔 중소기업의 해외투자액이 국내 설비투자를 앞지르는 사상 첫 '데드 크로스(dead cross)'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이정희 중앙대 교수(경제학)는 "최저임금 인상, 안전·환경 규제 강화 등으로 중소기업 입장에서 비용 구조가 점점 악화하고 있다"며 "기업을 계속 키워나갈 중소기업은 해외로 떠나고, 그러지 않을 곳은 매각하거나 회사 규모를 줄이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한국선 적폐, 베트남·인니선 영웅
매출 200억원 정도인 건축자재 업체 S사는 최근 인도네시아에 새 공장을 지었다. 내년부터 국내 공장 생산 물량 3분의 1을 이곳으로 옮긴다. 머지않아 인도네시아 생산 비율을 70%까지 늘릴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경기 파주에 있는 S사 한국 공장은 명맥만 유지하게 된다. 이 회사는 매년 10억원 정도 영업이익을 거두며 그럭저럭 회사를 유지해왔다. 최근 2년 사이 최저임금이 급격히 오르자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결국 80여 명이던 직원을 60명으로 줄였다. 허리띠를 졸라매봤지만 결국 작년 적자를 냈다. 노모 대표는 "지금 정부에선 중소기업 경영 환경이 좋아질 희망이 없다"며 "그나마 우리는 자금 여유 덕분에 해외에서 재도전할 기회가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다른 중소기업은 해외로 공장을 옮기기도 쉽지 않은 처지다. 한꺼번에 수십억원 드는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경기도 안산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권모 사장은 "해외로 가고 싶어도 엄청난 투자 금액이 필요하다"면서 "주변 중소기업 대표들은 다들 오도 가도 못 하고, 앉아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라고 했다.
중소기업의 해외 탈출은 단순히 인건비 부담 탓만은 아니다. 베트남으로 공장을 옮긴 한 중기 대표는 "여기(한국)서 중기 사장은 근로자를 착취하는 '악덕 자본가'이고 적폐 취급마저 받는다"며 "베트남에 가면 고위 공무원이 '감사하다'며 영웅 대접을 해준다"고 말했다. 그는 "한때는 중소기업 사장 명함이 일자리와 나라 살림에 보탬이 되는 애국자 증표였는데…, 이젠 짐을 내려놓고 싶다"고 말했다.
해외투자 느는 만큼 국내 투자 급감
우리나라 전체 고용의 83%를 책임지는 중소기업의 탈출 러시는 2~3년 새 국내 일자리 소멸로 이어질 것이 뻔하다. 5년 전만 해도 직원이 450명이었던 N사는 베트남·중국·필리핀에 잇따라 공장을 세우면서 국내 직원을 160여 명으로 줄였다. D사도 같은 기간 국내 직원이 600명에서 180명으로 감소했다. D사는 중국에 지은 신규 공장이 주력으로 자리 잡았고 국내 공장은 일부 물량만 맡으면서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구두 제조 업체인 바이네르의 김원길 대표는 "중소기업이야말로 일자리 공장이자 세금 공장"이라며 "국내 공장이 돌면, 돈을 벌어 법인세를 내고, 월급을 받은 직원들은 소득세 내고, 물건이 시장에서 팔리면 부가세가 나오지 않느냐"고 했다. 그는 "정부도 국민도 이 공장을 거들떠보지 않는 것 같아 서럽고 답답하다"고 했다.
‘별건수사’로 중소기업 죽이는 게 진짜 적폐
재계의 文정부 공기업 적폐 수사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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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 국세통계연보에 따르면 국내 중소기업 중 연간 순이익이 0원이거나 손실을 기록한 곳은 2014년 15만4890개에서 2017년 20만2181개로 급증했다.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는 것은 다음 연도에 법인세를 내지 못한다는 의미다. 2014년 이후 4년간 세금 한 푼 내지 못한 중소기업이 4만개 이상 늘어난 셈이다.
[성호철 기자 sunghochul@chosun.com] [강동철 기자]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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