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말법 [김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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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말법

2019.12.10

지난 11월 8일자 칼럼 ‘뒤바뀐 말’ 기억하시는지요? 일상생활에서 저지르기 쉬운 어법상 잘못을 소개했었죠. 이번 글도 비슷한 맥락에서 언어 습관의 잘못을 살펴봅니다.

# “OO역 O번 출구에서 만나.”

누구와 약속을 할 때 오갈법한 어법이에요.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말 하는 사람의 입장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상대방이 꼭 지하철을 타고 오리라는 법은 없잖아요. 택시나, 버스, 자가용, 도보로도 올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O번 출입구’라고 해야 바른 말법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긴 출구나 입구나 그게 그거지라. 길항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관계니까요. 동전의 앞면이나 뒷면, 손등이나 손바닥처럼. 삶과 죽음의 관계도 마찬가지인지도 모르겠네요.

# “이 역은 지하철과 승강장 사이가 넓으니 내리실 때 발빠짐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지하철 방송에서 무시로 듣는 말입니다. 발이 빠지는 것은 당연하고 그러니 일단 빠지고 나서 주의하라는 말인가요? 이 방송 멘트가 아직도 고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아래처럼 바루어야겠지요.
“이 역은 지하철과 승강장 사이가 넓으니 내릴 때 (발이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곁들여 오래전 유행했던 아재개그성 멘트도 생각납니다. 금연이 아니라 끽연을 권장하는 말법이었죠. “담배를 삼가 하시기 바랍니다.” 노파심에서 어법을 바루면 "담배를 삼가시기 바랍니다."

# “요새 통 바깥출입을 안 해서 말야.”

오랜만에 만난 친구 사이에 오갈 법한 말입니다. 반갑기도 조금은 쑥스럽기도 한 터에, 한편으로 친구의 변한(늙은) 모습에 놀라기도 하면서. 나도 못지않게 변했으려니 자괴감도 드는 터에. 큰 시비를 걸 것이야 없다 할지라도 원래대로라면 ‘안팎 출입’이라고 바루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사는 것이 변변치 못하고 자꾸 쪼그라들면 만사가 귀찮기는 하죠. 그러다 보면 경조사를 소홀히 하거나 친지 모임에 나가지 않는 일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바깥출입’을 안 한 지 꽤 오래되었네요. 내가 마지막으로 친구들에게 선을 보인 것이 언제였더라? 말이 나온 김에 (오래)간만에 올 동창회에는 참석해볼까?

#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말 뒤바뀜의 표현의 압권은 무어니 해도 기억도 아련한 ‘국민교육헌장‘입니다. 위 말은 헌장 첫머리에 나오는데, 순서도 안 맞는 협박성 신탁(神託) 때문에 이 땅의 남자들이 역사적 사명을 불러일으키느라 얼마나 가위눌리며 살았던가요? ‘역사적 사명’이란 말 자체도 버겁습니다. 그런 유의 거창한 담론은 초인(Uebermensch)이나 성현, 타고난(이 또한 말이 안 되지만) 애국지사 같은 사람들이 누란의 위기나 엄혹한 시대상황과 맞물려 여차여차해서 우연히 갖게 되는 것 아닌가요? 어찌어찌해서 태어나 ‘하루 벌어 하루 못 먹고 사는’ 이 땅의 갑남을녀(甲男乙女), 장삼이사(張三李四), 우수마발(牛溲馬勃)이야 택도, 어림도 없지예.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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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창식

경복고, 한국외국어대학 독어과 졸업.수필가, 문화평론가.
<한국산문> <시에> <시에티카> <문학청춘> 심사위원.
흑구문학상, 조경희 수필문학상, 한국수필작가회 문학상 수상.
수필집 <안경점의 그레트헨> <문영음文映音을 사랑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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