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무지개 [임종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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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무지개

2019.12.03

80대 중반이었던 나의 단골 이발사가 건강이 나빠져 일을 그만둔 이후 두 달 넘게 머리를 깎지 못했습니다. 11월 14일 서울 종로3가의 피카딜리 극장 뒷골목을 지나는데 극장이름을 딴 이용원 간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안에 들어서니 10평쯤 되는 공간에서 70대의 나이 지긋한 세 분의 이발사가 열심히 이발을 하고 있었습니다. 노인의 거리로 알려진 종로3가 일대에는 각종 노인용 서비스 업종이 번창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동네 이발소나 미용원에서 보통 1만 원~2만 원 사이인 이발료가 이곳에선 4,000원이었습니다. 여기에 염색비용 5,000원, 머리 감는 비용 500원을 더해도 9,500원이면 그만입니다. 이발료나 부가서비스료를 포함해도 보통 이발소에 비해 최소 절반 이하로 현저하게 싼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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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 3가에 있는 한 이발관의 검은 무지개. 처음엔 이것이 무슨 바닥 장판의 무늬인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고객의 머리를 깎기 위해 하루 10시간 씩 좌우로 왕복하는 이발사들의 발자국으로 푸른 장판의 겉무늬가 닳아 벗겨진 발자취였습니다.

5분쯤 지나 자리가 나자 그 의자를 담당한 이발사가 나에게 앉으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분들의 삶이 궁금했습니다. 나의 묻는 말에 나를 담당한 이발사 외에 옆자리의 두 이발사도 한 마디씩 거들었습니다.

“값이 싸네요. 봉사활동하시는 거예요?”

“아뇨. 돈 벌려고 하는 거죠.”

“세 분이 동업하시나요?”

“우리는 고용이발사이고, 주인이 따로 있어요.”

“손님이 많군요. 하루에 몇 명이나 깎으세요?”

“많을 땐 100명 정도 깎지요.”

“40만 원을 주인과 세 분이 나누시면 일당이 10만 원은 되나요?”

“10만 원이 훨씬 못되지요.”

“주인 몫이 커서 그런가요?”

“주인도 가게세 내고, 세금내고, 전기료 수도료 기타 재료비 내면 우리와 비슷하다고 봐야죠.”

“하루 몇 시간 일하세요?”

“아침 7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하죠.”

“처삼촌 벌초하듯 해도 한 사람 이발에 최소 15분은 걸려요. 한 사람이 30명 넘게 깎으려면 꼬박 7시간 이상 걸립니다. 점심시간, 손님 기다리는 시간을 빼더라도, 일하는 시간만 족히 10시간은 된다고 봐야죠.”

“적은 수입에 중노동이시군요.”

“그러니 오래 못 버텨요. 우리 셋 중에서도 2년 반 한 사람이 가장 오래됐고, 다른 두 사람은 각각 1년, 2개월 밖에 안 됐어요. 자주 바뀌는 편이죠. 이런 일을 젊은 이발사가 하겠어요? 우리처럼 나이 들어 용돈벌이로 하는 일인데 그것도 건강해야 가능한 거죠.”

(나의 21년 단골 이발사는 집이 있는 경기도 구리시에서 새벽에 전철과 버스를 3번씩이나 갈아타고 서울 은평구에 있는 이발소로 출퇴근했다. 그 분은 그것을 자신의 건강증명서로 여겼다. 이발사에 관한 나의 관심이나 이해는 전적으로 그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의사의 권유로 직업을 그만 둔 그분을 이발소에서 다시 볼 수 있기를 빈다.)

“가위질이 건강에 좋다고 하잖아요?”

“고스톱보다는 치매 예방에 좋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하하”

“요즘 이용학원 수강생 가운데 은퇴자들이 많다고 하던데요?”

“이발사가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이긴 하죠. 이민 가려는 사람들이 이발 기술을 배워두면 유용하다는 얘기도 하더군요.”

“세 분이 시간은 어떻게 나누세요?”

“공평하게 나누죠. 일을 먼저 끝낸 순서대로 새 손님을 받고, 손이 빈 사람이 머리를 감겨주는 식이죠. 식사도 지정식당에서 한 사람씩 30분 이내에서 교대로 하구요.”

“젊은 손님도 많나요?”

“장소가 장소인지라 대부분 노인들이죠. 요즘 젊은이들은 이발소 대신 미장원에 가잖아요.”

(때마침 직장인으로 보이는 젊은 손님이 들어왔다. 현찰이 없다며, 카드는 되냐, 자동이체는 되냐고 묻다가 안 된다고 하자 돈을 찾아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요즘의 세대 차이는 현찰과 자동이체 사이만큼 벌어진 듯하다.)

나는 이날 이발과 염색에 머리까지 감는 풀서비스를 받았습니다. 만 원을 내면서 “거스름은 안 줘도 된다”고 하자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때론 500원의 거스름돈으로 행복해질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용원 문을 나왔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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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종건

한국일보와 자매지 서울경제신문 편집국의 여러 부에서 기자와 부장을 거친 뒤 서울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사장을 끝으로 퇴임했으며 현재는 일요신문 일요칼럼, 논객닷컴 등의 고정필진으로 활동 중입니다.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및 감사를 역임했습니다. 필명인 드라이펜(DRY PEN)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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