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방위비분담금 협상] 80분 만에 문 박차고 나간 美


80분 만에 박차고 나간 美, 동맹인데 北 대하듯이 했다


   빛 샐 틈 없다던 한·미 동맹 관계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파행 상황이 벌어졌다. 양국 대표단이 19일 서울 한국국방연구원에서 방위비분담금 협상을 시작한 지 80분 만에 미국 측이 협상장을 나가버렸다.

 

방위비 협상 80분, 미국이 박차고 나갔다

‘나쁜 합의보다 노딜’ 전략 가능성

드하트 “한국, 우리 요구 부응 못해”


드하트, 한국에 새 제안 제시 요구

외교가 “미국, 동맹을 북·중 대하듯”

“지소미아 더 거센 압박” 관측도

에스퍼 “부자 한국, 더 기여해야”


당초 한·미는 11차 방위비분담금 특별협정(SMA) 체결을 위한 세 번째 협상을 18일과 19일 이틀에 걸쳐 하기로 했다. 18일 네 시간(오후 1~5시)에 이어 19일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점심시간을 포함해 일곱 시간 협상을 예정해 놓고 있었다. 하지만 회담은 오전 11시20분쯤 끝났다.


한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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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는 직후 출입기자단에 문자메시지를 보내 “방위비 분담 협상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했다”고 전했다. 외교부는 “미 측은 새로운 항목 신설 등을 통해 방위비분담금이 대폭 증액돼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우리 측은 SMA 틀 내에서 상호 수용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한·미 양측 모두 협상장을 먼저 떠난 것은 미국 협상 대표단이라고 확인했다. 주한 미 대사관 측은 오전 10시30분쯤 외교부 출입기자단에 연락을 취해 용산구 남영동 아메리칸센터에서 있을 행사에 참석해 달라고 요청했다. 낮 12시45분쯤 취재진 대기 장소에 제임스 드하트 미 측 방위비 협상 대표가 등장해 협상 결렬을 설명했다.

 

방위비 협상 다음일정 못 잡아 … 한·미동맹사 전례없는 파행

따라서 미국은 이날 오전 협상을 시작한 직후에 결렬을 결정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는 전날 협상에서 좁히기 힘든 의견 차를 확인한 미국 측이 파행을 선택지 중 하나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뜻도 된다. 소식통에 따르면 미 측은 미군의 한반도 순환배치 비용 등을 추가로 요구하며 50억 달러로의 증액을 주장했고, 한국 측은 이는 기존 SMA 틀에서 벗어난다고 맞섰다.

 

한·미는 협상이 틀어진 이유를 놓고 공개적으로 장외 여론전까지 벌였다. 드하트 대표는 “우리는 서로 수용 가능한 협정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하다면 우리의 입장을 조정(adjust)할 준비까지 했다”며 “하지만 불행히도 한국 측의 제안은 공정하고 공평한 방위비 분담을 위한 우리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결과적으로 우리는 오늘 협상 참여를 급하게 중단하게 됐다. 이는 한국 측에 재고의 시간을 주기 위한 것”이라며 “나는 양측 모두가 수용 가능한 협정을 맺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도록 새로운 제안들이 나오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협상 깨지자 장외여론전 … 한·미관계 현주소

특히 드하트 대표는 “우리는 한국 측이 상호 신뢰에 기반을 둔 파트너십에 근거해 노력할 준비가 되면 협상을 재개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그간 방위비 협상은 매달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한 번씩 열렸다. 그런데 드하트 대표는 차기 협상 일정에 대해 12월이 아니라 ‘한국이 준비되면’이라고 했다. 즉 미국이 만족할 새 제안을 들고 올 때 재개하겠다는 사실상의 조건을 내건 셈이다.

 

정은보 한국 측 수석대표도 오후 2시30분 내외신을 상대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정 대표는 “미국 측의 전체적인 제안과 저희가 임하고자 하는 원칙적 측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앞으로 계속 노력해 상호 수용 가능한 분담이 이뤄질 수 있도록 인내를 갖고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차기 협상 일정에 대해서는 “오늘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았던 사항이 발생했기 때문에 그에 따라 추가적으로 필요한 대응을 해나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전례에 따라 12월로 생각했으나 상황이 변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양국이 방위비 협상을 하다가 이날처럼 협상을 깨고 나와 각기 다른 입장을 발표하고 차기 일정도 확정하지 못한 채 헤어진 일은 전례를 찾기 어렵다. 현재 한·미 관계의 현주소가 드러난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은 “협상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미국은 “협상 참여를 중단했다”고 표현했지만 사실상 미국의 일방적 파행 선언이었다. 이를 놓고 내년 대선을 앞두고 방위비 문제에서 성과를 내야 하는 백악관이 한국의 지연전략 차단에 나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통일안보센터장은 “한국이 시간을 끌려고 하자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이 지난 15일 밝혔던 ‘방위비 분담금 증액’과 ‘연내 타결’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협상팀이 와서 다시 확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때 ‘나쁜 합의보다는 결렬이 낫다’는 원칙에 따라 노딜을 선언했고, 중국과의 무역협상에서도 합의한 세부사항도 번복하며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려 하고 있다. 외교가에선 트럼프 행정부가 동맹인 한국도 협상의 대상으로만 보고, 북한과 중국을 대하듯 ‘노딜 전략’을 구사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일각에서는 22일 자정 만료되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을 염두에 두고 종료 시 방위비에서 더 거센 압박을 예고했다는 관측도 나온다.



  

에스퍼, 주한미군 철수 질문엔 답 피해

김홍균 전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한·미 간에 가치와 신뢰에 기반한 동맹은 점점 사라지고 돈과 거래만 남은 관계로 가는 분위기”라며 “미국이 북한에나 써야 할 벼랑끝 전술을 한국에 들이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충격으로, 지소미아까지 종료된다면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에 화염과 분노를 표출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한편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이 19일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에 대한 답변을 피한 채 “한국이 방위비 분담금에 더 기여할 수 있고(could), 그래야만 한다(should)”고 강조했다. 이날 서울에선 제임스 드하트 미 측 방위비 분담금 협상 대표가 협상을 결렬시킨 데 이어 같은 날 필리핀을 찾은 에스퍼 장관은 한국을 겨냥해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촉구하는 동시다발 ‘한국 조이기’로 움직인 셈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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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이날 미군 공원묘지 헌화식을 위해 필리핀 마닐라를 찾은 에스퍼 장관은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 대한) 그 이상의 세부사항은 미 국무부에 맡겼다”며 “유능한 전문가들이 협상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에스퍼 장관은 그러면서도 “한국은 부유한 나라”라며 방위비 인상을 또 요구했다.

 

에스퍼 장관은 앞서 지난 15일 제51차 한·미 안보협의회의(SCM) 공동 기자회견에서도 “한·미 동맹은 매우 강고하지만 한국은 부유한 나라이므로 방위비 분담금을 더 낼 수 있고, 또 더 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에스퍼 장관의 이날 방위비 인상 기조는 달라진 게 없지만 주한미군과 관련해선 미묘한 변화로 비칠 수 있는 대목이 등장했다. 로이터 통신은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합의되지 않을 경우 주한미군을 철수할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에스퍼 장관은 미국이 어떻게 할지에 대해 답변을 피했다”고 보도했다.



  

여야 3당 원내대표 방미 ‘방위비 외교’

결렬된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과 관련,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나경원 자유한국당, 오신환 바른미래당 원내대표가 20일부터 4박5일 일정으로 미국을 찾아  우리 측 입장을 전달하는 ‘초당적 의회 외교’에 나선다. 방미 기간 미 상·하원 관계자들을 두루 만나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미국 측의 방위비 인상 요구가 과도하다는 입장을 밝히며 설득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특별대표와도 만난다.

유지혜·이유정·이근평 기자 wisepen@joongang.co.kr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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