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동창 영자 [한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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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동창 영자

2019.11.18

아이들 이름도 시대별로 유행이 있습니다. 요즈음 젊은 부부들은 드라마에서 뜨는 이름을 선호합니다. 1950년대에는 남자 이름은 ‘영’자 돌림이 많았습니다. 영식, 영수, 영철 등의 이름을 가진 학생이 한 반에 몇 명씩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이름 끝자에 '자. 순. 숙'자  돌림이 많았습니다. 여학생들 이름 거의가 '영자, 영숙, 영순, 정순, 정숙, 정자'였을 정도였습니다.

1960년대에는 남자는 끝자가 ‘호’ 자 돌림이 많았고, 여자는 가운데 자와 끝 자가 ‘미’가 유난히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삼고 살다보니 이런저런 일로 여자들을 자주 만납니다. 서로 통성명을 하고 나면 대충 50년도 생인지, 60년도 생인지 70년도 생인지 가늠이 간다는 점입니다. 이름 끝자가 남자는 ‘훈’, 여자는 ‘영’ 자이면 거의 70년도 태생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6학년 때 영자와 영숙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학생이 기억에 새롭습니다. 같은 반에는 김영숙, 최영자, 오영순 등이 있었는데 이영자와 이영숙은 같은 성씨였습니다. 특이한 점은 둘 다 나이가 또래들보다 대여섯살씩 많았던 점입니다.

요즈음은 모르겠지만 그때는 출석부 순서를 키 순서로 정했습니다. 반에서 제일 작은 동기가 1번 가장 큰 동기가 62번이었습니다. 영자와 영숙이는 여자인데도 61번과 62번이었습니다. 출선 번호가 끝 번호인 만큼 키도 컸습니다. 반에서 제일 큰 남학생도 영자나 영숙이 옆에 서있으면 키가 어깨를 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옆 반에도 몇 년 늦게 입학을 한 학생이 있었는데 남학생이었습니다. 그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통 틀어서 덩치가 가장 컸습니다. 그래도 숙녀 티가 나는 영자와 영숙이보다는 왜소해 보였습니다.

담임선생님은 영자와 영숙이를 같은 자리에 앉혔습니다. 물론 출석번호대로 자리를 배치했으니까 같은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영자와 영숙이는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시간만 있으면 둘이 속닥거리는 목소리로 대화를 나눕니다. 가끔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고 숨죽여 웃기도 하고, 어느 때는 얼굴을 붉히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습니다. 둘이 앉아 있을 때는 서로 뜻이 잘 맞는 둘도 없는 단짝이지만 혼자 있을 때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영자는 셋째 동생뻘 되는 우리들과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지냈습니다. 서로 농담도 하고, 깔깔 거리며 같이 웃기도 하고, 서로 때리고 맞고 뛰어 다니며 장난도 치고, 소풍 가서는 같이 둘러앉아서 김밥을 먹기도 했습니다.

영숙이는 혼자 앉아 있을 때는 늘 고개를 숙이고 노트에 무언가를 적거나, 조용히 창문 밖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가끔은 아이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으면, 대답도 하지 않고 소리없이 웃으며 대꾸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영숙이에게 말 거는 것을 좋아 하지 않았고, 영숙이도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운동회 하는 날 달리기 경기가 있었습니다. 영자는 죽을힘을 다해서 달렸습니다. 키가 크니까 2등과 당연히 비교를 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벌어졌습니다. 영자가 맨발로 트랙을 거침없이 달리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녀가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영숙이는 달리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담임선생님은 영숙이를 출발선까지는 억지로 세웠지만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고 포기를 하셨습니다. 영숙이는 그때부터 운동회가 끝나는 시간까지 내내 고개를 숙이고 손바닥만 한 나무 꼬챙이로 땅바닥만 긋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입니다.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화장실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노크도 안하고 첫 번째 문을 확 열었습니다. 놀랍게도 같은 반의 순자가 막 바지를 치켜 올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미안!”
순자에게 사과를 할 겨를도 없이 다른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볼일을 보고 문을 열려고 하는데 밖에서 잠겨 있었습니다. 화가 난 순자 짓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 문을 손바닥으로 막 두들겼습니다. 점심시간이 끝났는지 밖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애가 타서 막 눈물을 흘리는데 문이 열렸습니다.
“너, 울었지.”
문 밖에는 뜻밖에도 영자가 활짝 웃으며 서 있었습니다.
“안 울었어.”
“눈물이나 닦고 안 울었다고 햐.”
영자가가 웃음을 깨물며 얼굴에 묻어 있는 눈물을 닦아 주었습니다.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영자의 손을 뿌리치며 교실 쪽으로 막 뛰어갔습니다. 그 뒤로 영자를 볼 때마다 화장실에서 울었다는 소문을 낼까 봐 은근히 떨렸습니다. 다행히 영자는 졸업할 때까지 제가 화장실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소문을 내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삼거리에서 우연히 영자를 만났습니다. 포대기로 애기를 업고 버스에서 내리는 아주머니는 영자였습니다. 놀랍게 변한 영자를 보고 저도 모르게 빨리 걸었습니다.
“우리 동창! 만수 아녀!.”
영자가 제 이름을 부르며 반가워했습니다. 이름까지 부르는 통에 얼굴을 붉히며 돌아섰습니다. 일행으로 보이는 다른 아주머니들도 영자의 말에 저를 바라봤습니다.
“아! 우리 애기 이쁘지.”
영자가 등에 업혀 있는 아이를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제가 놀랄 사이도 없이 제재작년에 같은 동네에 사는 동갑에게 시집을 갔다고 말했습니다. 시집을 갔다는 말이 너무 낯설게 들려서 놀란 표정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참, 너 고딩이 좀 줄까?”
영자가 잊고 있었다는 얼굴로 들고 있던 자루를 땅에 내려놓았습니다. 자루 안에는 다슬기가 잔뜩 들어 있었습니다. 그때서야 다른 아주머니들을 보니까 모두 자루를 들고 있거나, 시장바구니 같은 것을 들고 있었습니다. 강에서 다슬기를 주워 오는 길이었던 모양입니다.

영자는 같은 동네에서 사는 동창들의 소식을 전해주기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저는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아서 건성으로 대꾸만 했습니다. 훗날 그때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하며 영자를 즐겁게 해 주지 못한 것이 얼마나 후회가 됐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영자의 아들이며 딸들이 결혼식을 할 때는 빠짐없이 참석해서 축하를 해 줬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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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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