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총을 찬 채 여죄수 데리고 탈북한 北 군인..."武力통일 지침 바뀐 적 없어"



"인민 군대, 武力통일 지침 바뀐 적 없어… '남조선 적대국' 관점도 그대로"
[최보식이 만난 사람]

[권총을 찬 채 여죄수 데리고 탈북한 北 군인… 라오스의 은신처에서 만나다]

"북한 군대는 건설 군대… 대규모 공사 현장마다 軍 병력 동원
작년엔 김정은이 지시한 원산 갈마 휴양지 개발 현장서 일해
집마다 건설 지원 명목으로 돈 거둬… 안 내면 '낙인 분자'로 찍혀
먹는 게 가장 심각… 옥수수밥도 없어 못 먹고 전기 사정도 열악"

     지난 7월 12일 북한 보안서 구류장(경찰서 유치장)을 지키던 특무상사 계급의 군인 김철수(가명)가 여죄수를 탈출시켜 두만강을 넘었다. 그는 실탄이 장전된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북 보위부원들이 대거 중국으로 건너가 그를 쫓았다. 중국 공안도 무장한 북한 군인의 잠입에 비상이 걸렸다.



석 달 반이 흐른 뒤인 10월 말, 나는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으로 날아갔다. 북한 추적조를 피해 3개국 국경을 몰래 넘고 수천㎞를 달려 그는 여죄수와 함께 여기까지 들어온 것이다. 작은 키에 '똘망똘망해' 보였다.

참고자료: '탈북을 시도하고 있는 북한 주민', 출처: 구글코리아, '탈북자'/통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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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 온성군 출신입니다. 1993년생입니다. 군에서 9년을 복무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중학교를 졸업하는 17세에 입대해 10년간 군복무를 한다. 그는 보안서 구류장를 지키는 '계호원'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요즘 북조선 군대의 태반은 '건설 군대'가 됐습니다. 저는 계호원인데도 여러 건설 현장에 불러 다녔습니다. 그래서 타일도 잘 붙입니다. 작년 8월에는 원산 갈마 휴양지(김정은의 지시로 대규모 국제관광단지 조성) 개발 현장에 나갔더랬습니다. 올 4월 보안서로 되돌아와서 이 사람(여죄수)을 봤습니다."



여죄수는 남한에 와 있는 탈북자 언니와 연락하면서 탈북 중개인 노릇을 하다가 2012년 체포됐다. 그녀는 구류장과 교화소(감옥)를 합쳐 5년간 살다가 출감했다. 이번에는 탈북자가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에게 돈을 부쳐주는 일에 손댔다. 남한에서 중국은행으로 송금하면 그녀는 북한을 왕래하는 화교(華僑)에게 돈을 인출해오게 해 당사자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그러다가 올 1월 초 중국 휴대폰으로 국제 통화를 하는 현장에서 체포돼 보안서 구류장에 들어왔다.

"재판정에서 이 사람은 4년 3개월 형이 확정됐습니다. 그날 제가 호송을 맡았습니다. 중형을 선고받은 이 사람은 '재범(再犯)교화소는 더 어렵다. 이번에 들어가면 나는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며 울었습니다. 제가 '울지 마라, 두만강 넘는 걸 책임질 테니 가자'고 했습니다."

―계호원이 자신이 감시해야 할 죄수에게 함께 탈출하자고 했는데, 어떤 관계인가요?



"이 사람이 열세 살 연상이지만 몇 달 동안 감시하면서 서로 정이 들었고, 저도 여기서 버러지처럼 살 바에야 한국에서 제 인생을 한번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요즘 북조선에서는 군대 복무 10년을 해도 노동당 입당(入黨)이 어렵습니다. 북조선에선 당 간부들이나 먹고살지, 토대(출신 성분)가 그르면 살기 힘듭니다."

―한국은 어떤 나라일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나요?

"구류장에 있으면 손전화(휴대전화)를 하다가 잡혀온 죄수들로부터 얘기를 들었습니다. 남한이 잘살고 경제대국이라는 걸 조선 사람들은 웬만하면 다 압니다. 남한에 간 사람들이 북조선 가족에게 돈을 부쳐주고 있으니까요."

탈북한 군인 김철수(가명)는 “판문점 정상회담 뒤로 북한에서는 체제 단속이 더 심해졌다”고 말했다. 라오스 은신처에서 인터뷰하는 장면. 오른쪽 뒷모습이 김철수, 왼쪽은 함께 탈출한 여인.



―군(軍) 동료나 친구들과 남한 얘기를 나눈 적 있었나요?

"적대국가(한국)에 대한 얘기를 못 합니다. 요즘 북조선에서는 '자기 잔등도 남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눈으로 보는 것 빼고는 믿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구류장에서 죄수를 탈출시킬 수 있었지요?

"탈북 결심을 하고는 중국돈과 칼, 극약, 음식 등을 담은 배낭을 꾸렸습니다. 목표로 정한 그날 밤 제가 자정부터 새벽까지 구류장 근무를 자원했습니다. 자정이 넘어서 이 사람을 깨워 구류장 뒷문을 따고 빠져나왔습니다."

―외곽 경비도 있었을 텐데?

"보초는 정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공화국 역사에서 계호원이 죄수를 데리고 나간 적이 없었으니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전혀 예상 못 했지요. 권총을 찬 군복 차림으로 나왔습니다. 누가 앞을 막으면 쏘고, 잡히면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두만강 국경까지는 어떻게 갔습니까?

"구류장에서 두만강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입니다. 강가에 닿자 불과 얼마 안 떨어진 곳에서 말소리가 들렸습니다. 우리를 쫓아오는 줄 알았는데, 근무 교대하고 돌아가는 국경경비대원들이었습니다. 숲속에서 한동안 숨죽이며 기다렸습니다."

―두만강을 건너는 데는 별문제가 없었나요?

"두만강 중간쯤에서 강물이 키를 넘었습니다. 수영을 못하는 이 사람이 '살자고 나왔는데 다시 돌아가자'고 울먹였지만 어떻게 되돌아갑니까. 이제 죽었구나 싶었던 순간 발이 강바닥에 닿았습니다. 두겹 철조망을 세워놓은 중국 쪽 국경에 왔을 때는 동이 터 있었습니다. 들킬까 봐 강가의 수풀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오후 무렵 낚시를 하러 나온 중국인이 보였습니다. 다가가서 손전화를 빌려달라고 하니 그가 놀라 도망쳤습니다. 신고할까 봐 걱정했지만 괜찮았습니다. 밤이 돼 중국 국경 마을로 들어갔는데 한 조선족 노인과 마주쳤습니다. 그도 전화를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혹시 신고할까 봐 마을 산속에서 사흘간 숨어 지냈습니다."

―중국 국경마을을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나요?

"이 사람이 산을 내려가 그 조선족 노인에게 '1년 전에 돈 벌려고 조선에서 나왔는데 매매꾼들이 나를 팔아먹으려고 한다'는 식으로 애걸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국에 와 있는 탈북자 언니와 통화해 지금까지 도움을 받게 됐습니다."



이들의 탈북 뒤에는 '수퍼맨'으로 불리며 지금껏 4000명을 탈북시켜온 K목사(작년 2월 26일 자 인터뷰 인물)와 김영자 북한인권시민연합 사무국장이 있었다.

탈북 지원 조직의 활동은 통상 3단계로 나뉜다. 북한 땅에서 두만강을 넘게 해주는 것, 중국 국경에서 옌지(延吉)를 거쳐 선양(瀋陽)까지 데리고 나오는 것, 그 뒤 선양에서 제3국으로 탈출시키는 것이다. '수퍼맨' K목사의 비밀조직은 마지막 단계에서 활동해왔다. 그 경우 탈북 경비가 실비로만 약 200만원이 든다. 탈북자에게 이를 청구하지 않는다. 모든 경비는 북한인권시민연합 등에서 모아주는 후원금(우리은행 142-097009-01-201 북한인권시민연합)으로 이뤄져 왔다.

이번에는 북한 추적조가 따라붙고 중국 공안에 비상이 걸려서 엄청난 탈출 경비가 예상됐다. 하지만 그는 잡히면 공개 총살감이니 일단 구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 옌지 외곽의 마을에 석 달간 그를 숨겨야 했다. 은신처를 두 번 옮겼다. 




그가 소지한 권총을 모종의 경로로 중국 공안에 반납하면서 검문검색이 얼마간 완화됐다. 선양에서 베트남에 인접한 국경도시로 이동시킬 때 택시 두 대를 대절했다. 앞선 차가 검문 상황을 살펴 뒤차에 연락했다. 택시 한 대당 기사 두 명이 교대로 24시간 달리게 했다.

탈출할 때 소지했던 권총.

―어느 시점에서 '이제 살았구나' 안도했나요?

"조선 땅을 넘어 중국에 들어오면서 살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사실 죽음을 각오하니 무서울 게 없었습니다."

―패기가 있군요. 작년 4월 판문점 정상회담이 있은 뒤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에 평화가 왔다'고 했어요. 북한 안에서도 그런 변화 기류가 있었나요?

"달라진 것은 없고 오히려 체제 단속이 더 심해졌습니다. 남한·미국·일본 영화를 보다가 적발되면 바로 교화소(감옥)로 갑니다. 두만강 국경을 몰래 넘을 때의 처벌도 더 무거워졌습니다. 당(黨)에서 평화 정책을 떠들든 어떻든, 군(軍)에서는 전혀 입에 못 올립니다. '무력으로 남쪽을 통일하겠다는 관점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지침이 바뀐 적 없습니다. 인민 군대는 오직 무력통일관(觀)을 갖고 있습니다. '남조선은 적대국가'라는 관점이 한 번도 달라진 적 없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과 백두산을 방문했고, 북한 주민들이 열렬하게 환영한 소식을 알고 있나요?

"알지만 그건 형식뿐이지 내용에서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김대중·노무현 때 북남관계가 어떻고 통일할 것처럼 말했는데 뭐 된 게 있나요. 우린 그런 걸 믿지 않습니다. 트럼프와 두 번 회담했지만 아무런 기대나 관심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에게 차려지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개뿔도 없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김정은의 통치에 대해 어떻게 봅니까?

"초기에는 세게 기대했는데 정책이 이랬다 저랬다 바뀌는 것이 많고, 뭘 내라는 것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인민들을 위한다는데 점점 조이는 것이 더 심해졌다 말입니다. 오히려 원산 갈마 휴양지 개발에 일 나가야 하고, 조선 각지 집마다 뭘 내라는 부담에 얼마나 시달리는지 모릅니다. 뜯어가는 돈이 더 늘었습니다."

―세금이 늘었다는 건가요?

"세금으로 걷는 게 아니라 '무엇을 건설한다'며 지원 명목으로 내라는 겁니다. 안 내면 비판부대를 내세워 낙인 분자로 찍습니다. 기업·공장에 나가도 배급을 제대로 안 줍니다. 한 달에 쌀 한 킬로(1㎏)도 못 삽니다."

―과거보다 살림살이가 더 어려워졌다는 뜻인가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민간에서는 다들 손전화 하나씩 쓰고 경제는 조금 발전했지만, 먹는 게 한심하다 말입니다. 강낭밥(옥수수밥)도 없어 못 먹습니다. 그것도 꾸어서 먹어야 하고 가을에 못 갚으면 두 배로 갚아야 합니다. 또 전기 사정이 너무 안 좋습니다."

―국경 지역이라 그런 게 아닌가요?

"평양도 전기 사정이 안 좋았습니다."

―평양을 가봤나요?

"지방 주민들은 평양에 못 들어갑니다. 다른 도(道)를 넘어가려면 증명서를 떼야 하는데, 특히 평양 증명서 떼기가 어렵습니다. 평양 못 가본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학교 다니던 열네 살에 '아리랑 축전', 열여섯 살에는 견학으로 열흘간, 군대에 있던 2016년에는 평양 건설 현장에 나갔더랬습니다."



―한국에 들어오면 무엇을 가장 하고 싶나요?

"대학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북조선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어디 가지를 못하고 벌어먹지도 못하지만, 남한에 가면 통제도 없고 내가 열심히 하면 먹고살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열흘 뒤 그가 메콩강을 건너 마지막 경유국에 안전하게 도착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그는 내 아들보다도 한 살 어렸다.
[최보식 선임기자 congchi@chosun.com]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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