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말 ‘결’ [노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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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좋아하는 말 ‘결’

2019.11.04

덕수궁 돌담길은 낭만적입니다. 연인과 함께라면 더없이 행복하겠지만 혼자 걸어도 즐겁습니다. 요즘 같은 가을날, 낙엽이 꽃잎처럼 흩날리는 이 길을 걸으면 마음이 순해지고 시인이 되는 기분마저 듭니다.

정동길 들머리(끝자락으로 보는 이들도 있을 듯)에 위치한 경향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 말갛던 스물여섯 처녀가 극성맞은 쉰 살 아줌마로 변한 세월은 어디로 갔는지, 이곳은 20여 년 전 그대로입니다. 그런 까닭에 게으름이 늘고 심보가 틀어진 날이면 이 길을 걸으며 스스로를 토닥이곤 합니다. 계절 따라 꽃, 낙엽, 눈을 ‘즈려밟으며’ 추억에 잠기는 이들의 표정만 봐도 행복해지거든요.

얼마 전에도 덕수궁 길을 걸으며 마음속 부아를 거둬냈습니다. 속이 편해지니 집 안 구석구석 쌓인 먼지들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늦은 감이 있지만 가을 대청소를 했습니다. 일 년 동안 입지 않은, 상태 좋은 옷들은 아름다운가게에 기증했습니다. 해진 옷들은 손바닥만 하게 접어 듬성듬성 바느질해 걸레로 만들었습니다. 거실 바닥에 윤 낼 때 쓸 걸레입니다.

힘센 아이에게 늘 교실 바닥 청소를 맡겼던 국민(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떠올라 남편에게 (정중히) 바닥 물걸레질을 시켰습니다. 마룻바닥에 청소용 오일(양초를 쓸까 잠깐 고민도 했습니다)을 칠하고 윤을 내는 민감한(?) 작업은 제가 했습니다. 무턱대고 밀기만 한다고 윤이 날 리 없기 때문입니다.

마룻바닥 청소는 결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뭇결 방향으로 문질러야 반짝반짝 고운 자태를 드러내거든요. 다 되었다 싶으면 딸아이에게 양말을 신긴 후 썰매를 태우듯 손을 잡고 끌어 봅니다. 키 170센티가량의 스물세 살 청년이 가볍게 끌려오며 재미있다고 깔깔거립니다. 이 정도로 마룻바닥이 매끄럽다면 청소는 완벽하게 된 것입니다.

‘결’을 강조하는 목각 예술가가 있습니다. 그는 나무의 결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조각도를 쓸 땐 결을 따라 칼질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결을 거슬렀다가 피 본 사람 여럿입니다.” 그러곤 조각도를 들고 나무의 결 반대로 파 들어갑니다. 밑그림대로 새겨지지도 않거니와, 거친 거스러미가 바닥에 마구 떨어집니다. 결을 거스르지 않고 칼질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몸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결은 뜻도 소리도 참 곱습니다. 이 부드럽고 예쁜 말을 표준국어사전은 “나무, 돌, 살갗 따위에서 조직의 굳고 무른 부분이 모여 일정하게 켜를 지으면서 짜인 바탕의 상태나 무늬”라고 재미도 멋도 없이 설명합니다. 그러니 딱딱한 설명일랑은 맘에 두지 말고 입으로 소리 내 말해 보세요. 마음결, 머릿결, 바람결, 물결, 숨결…. “○○껴얼~” 하고 리듬과 함께 입안에 파동이 느껴지지요. 하나같이 잘고 고운 무늬가 보이는 듯합니다. 결은 오랜 세월을 거쳐 생겨난 일정한 흐름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일까요. 결에서 ‘순리’라는 단어가 보입니다.

계절 역시 결이 있겠지요. 대청소도 끝냈겠다, 가을의 결인 햇살을 느끼러 나가 봅니다. “흐미~ 고마운 볕들. 햇살에 요놈들이 잘 마르면 김치도 담그고, 고추장도 담그고. 우리 새끼들 입을 즐겁게 해줄 요놈들~ 흐미 고마운 볕들.” 옆 동에 사시는 할머니가 아파트 놀이터에서 노래를 부르듯 중얼거립니다. 멍석 위에선 고추와 무말랭이가 단내를 내며 곱게 말라갑니다. 잘 익은 햇살 한 줌도 허투루 쓰지 않는 살뜰한 할머니의 마음결에 절로 빠져듭니다. 시인 박노해도 할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가을볕이 너무 좋아’를 노래했을까요.

“가을볕이 너무 좋아/고추를 따서 말린다//흙마당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는/ 물기를 여의며 투명한 속을 비추고/높푸른 하늘에 내걸린 흰 빨래가/ 바람에 몸 흔들며 눈부시다//가을볕이 너무 좋아/가만히 나를 말린다//내 슬픔을, 상처난 욕망을, 투명하게 비춰오는 살아온 날들을…”

당신은 어떤 마음결을 지니고 있나요? 누구나 기질과 타고난 성질이 다르듯 마음결도 제각각이겠지요. 솜털처럼 보드라운 마음결이 있는가 하면, 상처받아 아픈 마음결도 있을 거예요. 그러니 다른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살아야겠습니다. 나뭇결을 살펴 마룻바닥에 윤을 내듯 다른 이의 마음결을 돌아보면 그들의 얼굴에서도 환한 빛이 날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마음결을 지닌 사람이 좋습니다. 따뜻한 사람이고 싶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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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노경아

경향신문 교열기자·사보편집장, 서울연구원(옛 시정개발연구원) 출판담당 연구원을 거쳐 현재 이투데이 부장대우 교열팀장. 우리 어문 칼럼인‘라온 우리말 터’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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