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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접기의 미래
2019.10.31
고릴라가 쿵쿵 걸어오더니 긴 팔을 살짝 꼬고 몸을 구부립니다. 덩치와는 다르게 애교 가득한 몸짓을 보니 “귀여워”를 연발하게 되네요. 그런데 마냥 귀염만 있는 건 아닙니다. 자세히 보니 이마 아래 숨어 버린 그림자는 사랑받고 싶은 고독한 눈빛이 되어 말을 겁니다. 높이는 불과 15센티나 될까 말까. 두툼한 진회색 부드러운 종이 질감이 무겁고 둔해 보이는 고릴라의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그 옆에는 빠삐용(Papillon)이 도도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귀가 오뚝하게 세워진 모습이 뒤에서 보면 나비를 닮았다고 해서 빠삐용이라 불리는 견종입니다. 가슴을 활짝 펴고 고개를 뽐내듯 세운 모습은 흰색과 금색으로 이루어진 양면 색종
<Gorilla>, Terry Nicolas (France), 22 x 12 x 18 cm (2019 세계종이접기창작작품 공모전_금상, 출처: 종이나라박물관)
이의 색감으로 더욱 멋스러워 보입니다. 활발하고 머리가 좋고 질투심도 많은 성격이라는데
그 특징을 살린 세밀한 형태적 표현과 표정 묘사가 압권입니다.단순한 종이접기로 어쩌면 이렇게 특징을 잘 잡아낼 수 있는 건지, 풍부한 표현력에 감탄을 하게 됩니다. 더욱이 이 모든 걸 칼질도 풀질도 없이 오로지 단 한 장의 종이를 접어 만들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사랑스럽고 앙증맞은 작품들에 눈을 맞추고 있으니, 갑자기 시간여행이라도 떠난 듯 동심으로 돌아가고, 종이 재료의 물성에서는 고요한 명상적인 울림까지 느껴지며 마음이 포근해집니다.얼마 전 종이문화예술작품 공모대전에서 만난 작품들입니다. 어떻게 접으면 이런 모양이 나오게 될지 궁금한데, 공모 접수 시 도면을 받는다고
빠삐용 (Papillon), 이보연 22 x 12 x 18 cm (2019 세계종이접기창작작품 공모전_대상, 출처: 종이나라박물관)
합니다. 도면이 앞에 있다면 저도 한 번 접어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아집니다. 딱지부터 종이비행기, 종이배, 카네이션 종이꽃, 천 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종이학까지. 어린 시절부터 흔하고 친숙했던 것이 종이접기입니다. 그런데 이 네모난 종이가 어떻게 이렇듯 다양한 형태로 표현될 수 있는지, 종이접기가 갖고 있는 무한한 확장성과 창의성에 새삼 놀라게 되었습니다.우리 조상들은 예부터 종이를 많이 접으면 슬기로워진다는 뜻으로 ‘지혜지’라는 딱지를 접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종이를 접으면 지혜롭게 될까요? 일리 있는 말입니다. 디지털화되는 시대 특히 스마트폰의 지나친 노출로 전두엽 기능이 약화되는데, 종이접기를 하면 눈으로 보고 양손을 써서 좌뇌 우뇌의 균형적 발달에 도움이 됩니다. 작은 색종이를 접다보면 정교한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몸의 소근육도 발달됩니다.종이 접기 전의 형태와 접기 뒤의 완성 형태를 예상하는 동안 상상력이 생기며, 접기의 과정을 하나씩 밟아가는 동안 인내심을 기르고 집중력을 키우게 됩니다. 친환경적인 부드러운 종이를 촉각으로 느끼는 동안 정서 안정에 도움이 될뿐더러, 색종이의 여러 색감을 통한 색채 감수성 경험도 뇌에 기분 좋은 자극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이 좋은 것을 유아, 초등학생 때 많이 하게 됩니다.그런데 이러한 종이접기는 놀이이자 개인의 지덕체(智德體)를 개발하는 도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활용이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2018년 미국건축디자인저널 <이볼로>가 주관한 미래초고층빌딩 아이디어 공모전에서는 종이접기 기법을 활용해 설계한 <스카이셸터닷집(Skyshelter.zip)>이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폴란드 건축가들이 만든 것인데, 재난지역 구호용 임시건물로 쓸 수 있는 접이식 건물로서 압축할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또한 걷고, 높이 뛰는 등의 날렵한 활동에서부터 집단지성을 통해 목표를 달성하는 행동방식에 이르기까지, 개미처럼 군집으로 활동하는 초소형로봇개미(트라이봇)에 대한 연구 성과가 2019년 과학전문저널 <네이처>지에 발표되기도 했습니다. 이 로봇 또한 종이접기 구조를 가졌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종이접기의 감각과 경험이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창의적 놀이 활동이 되는 것입니다.디지털 시대 자기 몸의 오감을 사용하고 사람과 교감하는 놀이와 예술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중 종이접기는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서. 우리의 감각을 깨우고 생각을 펼치고 키워나가는 매우 소중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종이접기의 영감, 성취의 기쁨이 우리의 미래를 보다 윤택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좀 더 다양하고 좀 더 높은 수준의 종이문화예술을 꿈꾸며 종이접기의 미래를 기대해봅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안진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 삶의 중심은 그림이지만 그림과 함께 일상을 풀어내는 방법은 글이다. 꽃을 생명의 미학 그 자체로 보며 최근에는 ‘꽃과 문명’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저서 <당신의 오늘은 무슨색 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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