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에스컬레이터 [홍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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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에스컬레이터

2019.10.30

몇 달 전 어느 은행 지점장과 팀장의 대화를 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고객과의 저녁 식사를 마친 뒤였습니다. 약간의 술기운이 있는 여성 팀장이 말했습니다. “지점장님, 저는 역량이 부족한가 봐요.” “자네 능력은 내가 알고 있어. 내가 할 말은 번아웃(burn-out)되지 말라는 거야. 열정이 있고 능력을 다 발휘하는데도 안 된다면 환경 탓이지. 만일 열정이 없는 사람이라면 내가 가만두지 않았을걸. 팀원들도 팀장 따라 열심히 하고 있지 않나?”

그런 대화가 좀 더 오간 뒤 팀장이 먼저 집으로 향했습니다. 지점장에게 말했습니다. “훌륭한 리더이시군요.” “저는 직원들과 서로 이해하고 마음을 소통하는 것을 우선으로 여깁니다. 안 그러면 일이 되겠습니까? 하다 보면 내가 힘들 때 그들이 나를 위로해 주기도 합니다.” 그는 오늘날 은행의 경영 환경이 많이 변하고 있어서 성과 내기가 쉽지 않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에게서 고객이니 영업이니 하는 단어를 들으며 실제로 은행이 변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과거에는 은행 사람들이 거래처, 섭외라는 어휘를 쓰던 기억이 납니다. 지점장과 팀장은 열심히 무언가를 해 내려는 사람들이라 생각했습니다.

상황은 다르지만 디자인 회사의 경리 직원에게서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열심히 일하고 있고 보수도 많이 받고 싶습니다. 그런데 주 52시간제로 제한을 가하는 건 싫습니다.” 비슷한 말을 다른 회사원에게서도 들었습니다. “나는 아버지와 그 세대를 존경합니다. 아버지가 직장 다니실 때 얼마나 열정적으로 일하셨는지 기억합니다. 그분들의 땀으로 한국의 경제 수준이 이만큼 되었습니다. 나도 아버지를 본받아 일하는 데에 열정을 바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일하는 시간을 제약하겠다니 유감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과거 회사에서 일하던 기억이 나며 마음속으로 그때의 흥분을 되새기기도 합니다.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만 그런 것은 아니지요. 프랜차이즈 맥줏집의 주방 직원인 중년의 여인은 하루 12시간씩 일하며 한 달에 하루만 쉰다고 했습니다. 몸이 고단하다고 토로했습니다. 점주는 밤 12시를 좀 넘겨서 퇴근하고 그 직원은 새벽 4시까지 일한답니다. 그런 그가 홀의 아르바이트 일손이 부족하면 때마다 달려 나와 손님 응대를 합니다. 손님을 대하는 얼굴은 항상 웃음을 띠고 있습니다. 점장과는 인척 사이라고 하니 긴 근무 시간에 대해 서로간 어떤 이해(理解)는 있겠다 싶지만, 그 태도는 놀라울 정도입니다.

며칠 전에는 의정부 성모병원에 갔다가 벽에 붙어 있는 병원의 역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중 사회 봉사활동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환자의 귀를 들여다보는 의사의 눈길에서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렇지요. 열정을 가진 사람, 마음을 다 쏟아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아름답습니다. 일하는 시간의 길고 짧음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를 바꾸어 보겠습니다. 자주 이용하는 지하철역 중 몇 곳에서는 에스컬레이터를 빈번히 수리하였습니다. 오르막 에스컬레이터가 수리 중이어서 멈춰 있으면 힘들여 계단을 오르는 노인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들은 느리게 몇 계단 오르고는 한참 쉬었다 오르기를 반복합니다. 최근 몇 해 사이 지하철역에 많이 붙은 문구가 있습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걷거나 뛰지 마세요.” “두 줄로 타세요.” 고장을 줄여 보자는 의도이겠지요.

의문이 생겼습니다. “아니, 튼튼하게 만들면 되지. 사용하는 사람들이 조심해서 다니라고?” 마치 이층집을 지어 놓고는 무너질지 모르니 이층에는 무거운 가구를 들이지 말라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지요. 기계 설비를 만들 때는 내구성이나 강도와 관련된 설계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용자가 조심해야 할 정도라면 잘못되었습니다. 대형 건물이나 백화점의 에스컬레이터가 고장나서 멈춰 서는 일은 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같은 장치인데 지하철역에서는 왜 멈춰 서는 일이 잦을까요?

지하철 회사가 에스컬레이터를 주문할 때의 품질 요구사항이든 설치하는 회사의 시공 품질이든 둘 중 하나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적어도 어느 한 편이 최선을 다하지 않은 탓입니다. 앞에서 예를 든 사람들처럼 나름대로 자기 할 일을 열정까지는 아니어도 성실히만 한다면 고장 날까 봐 조심해서 사용해야 하는 에스컬레이터를 만들지는 않을 터입니다.

자주 타던 에스컬레이터 중 하나는 얼마 전 완전히 새것으로 바꿔 설치되었습니다. 당분간은 잘 돌아가겠지요. 그런데 이전과 같은 태도로 설치하였다면 얼마 가지 않아 다시 고장 수리하는 광경을 보게 될지 모릅니다. 예방 점검을 하는 모습만 보고 싶은데 말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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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홍승철

고려대 경영학과 졸. 엘지화학에서 경영기획 및 혁신, 적자사업 회생활동 등을 함. 1인기업 다온컨설팅을 창립, 회사원들 대상 강의와 중소기업 컨설팅을 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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