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에서 열린 아이디어 경연(競演) 한마당 [정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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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에서 열린 아이디어 경연(競演) 한마당

2019.10.25

작년 평창 동계올림픽이 요란스럽게 열렸던 그 자리, 평창올림픽플라자 터는 한동안 텅 빈 채로 있다가 이달 초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개회식과 폐회식이 멋지게 벌어진 올림픽플라자 건물이 사라진 지는 제법 되었고 그 자리에 대형과 중소형 돔 구조물(Geodesic Dome) 7개가 세워져 새로운 사용자를 맞고 있습니다. 나름 탄탄한 구조를 갖춘 올림픽 건물이 비록 임시였을망정 그렇게 빨리 허물어진 것을 보고는 망연자실까지는 아니더라도 허허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올림픽 개최에 관여한 우리 기관들 간 얽힌 사연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이 큰 시설을 유지하고 관리할 예산이 없어 단번에 없애는 것이 최상의 방안이란 결론에 이르렀었다는 것입니다. 나라의 자산을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으며 한참 떨어진 곳에 여전히 펄럭이는 만국기가 민망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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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건물은 사라지고 대관령 동네 한복판에 버려진 빈터만 황량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평창군은 돈이 들지 않는 방식으로 이 빈터를 새롭게 단장하고 그 자리에 평창 올림픽의 모티브인 평화 이념을 새롭게 살리고 이를 두고두고 이어갈 수 있는 커다란 행사를 구상하였습니다. '2019 세계문화오픈대회'로서 영어 명칭으로는 'Better Together Challenge 2019'였습니다. 제가 이따금 관여하고 있는 월드컬처오픈(World Culture Open)이 평창군과 파트너가 되어 세계적인 행사를 기획.운영하였습니다. 2017 청주 대회, 2018 대전 대회에 이어 세 번째로 선보이는 세계대회였습니다.

한글 이름과 영어 이름이 왜 이렇게 달라야 하느냐는 의문이 들 수 있겠죠. 글로벌한 문화행사이긴 한데 그 목적과 방식이 특이하기 때문이랍니다. 월드컬처오픈은 '더불어 잘 사는 세상(Better World Together)'이라는 비전 아래 공감과 평화라는 두 테마를 중심으로 세계 각국, 각 지역, 간 문화 간 벽을 허물어 보다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고자 전 지구적인 운동을 펼치는 민간단체입니다. 이런 일을 함에 있어 이른바 '브랜딩'으로 내세운 것이 '베터 투게더(Better Together)'입니다. 그냥 세계인들이 모여서 벌이는 축제가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세계인들의 아이디어 경연이기 때문에 페스티벌 대신 '챌린지(Challenge)'를 붙였습니다. 세계문화오픈대회는 결국 'World Culture Open'이 지향하는 '열린 문화의 세계'로 가기 위한 대회가 되는 것이죠. 국.영문 이름이 내용상으로는 결국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3일 간 진행된 이번 대회의 주제는 '평화, 환경, 평창'이었습니다. 첫째 지구촌의 평화를 진전시키기 위한 아이디어, 둘째 지구 환경을 잘 지키기 위한 아이디어, 셋째 평창의 올림픽 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아이디어입니다. 참가자들이 이 세 가지에 관한 아이디어들을 내어 서로 경합하는 대회였습니다. 그냥 아이디어만이 아니라 참가자들이 지금까지 스스로 실천해 온 구체적인 사례 발표를 통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국내에서 여러 단계 예선을 통과한 50개 팀의 경연과 이를 통한 글로벌 경연 참가자격을 얻은 10개 팀을 포함하여, 세계 각지에서의 신청자 5천여 팀 중에서 여러 차례 심사를 거쳐 선발된 30팀, 도합 40여 팀 간의 결선 경연이 3일 간 이어졌습니다. 그외에도 '오픈 보이스'라는 이름으로 동시 진행된 50여 개의 열린 토론방, 그리고 '스쿨 앤드 페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참가자들의 경험 전수, 혁신제품 소개 마당 등이 행사의 주 내용이었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저마다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사회혁신가(Social Innovator) 또는 공익활동가로 불리고 있습니다. 월드컬처오픈은 이들을 '컬처디자이너'로 부르기도 하죠.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기술보다도 세상 곳곳의 사람들이 만들어나가는 문화라는 것입니다. 컬처디자이너는 창의와 재능을 바탕으로 문화를 새롭게 기획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되겠지요. 오래전 이런 민간 문화운동이 시작된 이래 최초의 컬처디자이너 타이틀을 보유하게 된 분이 이어령 선생입니다. 현재까지 정식으로 등록된, 세계 각지의 컬처디자이너는 5천여 명이 넘지만 실제로는 셀 수 없는 숫자의 사람들이 공익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묵묵히 이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뿌듯하게도 하고 숙연하게도 합니다.

이들이 평창에 와서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남겼느냐가 궁금하실 것입니다. 우선 개막 행사를 장식한 두 사람의 연사가 던진 메시지가 크게 메아리쳐 울립니다. 한 사람은 네덜란드 출신의 천재 발명가이자 공익활동가입니다. 데이브 하켄스(Dave Hakkens) 라는 30대의 젊은 디자이너는 '귀중한 플라스틱(Precious Plastic)'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플라스틱 폐품을 분리, 분쇄하고 녹이는 기기를 발명하였습니다. 특허 없이 오픈소스로 누구나 제작 방법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면서 그 제품을 거래하는 플랫폼도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수년 간 벌써 세계 곳곳에서 그가 발명한 기기를 현지에서 만들어 주변의 플라스틱 폐품을 처리하고 있으며 재활용을 통해 섬세하고 멋진 공예품으로 탄생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행사 현장에서 시연하는 과정과 제품을 본 저도 경탄할 정도로 멋진 물건들입니다. 로봇이 각종 플라스틱을 물성과 색깔에 따라 세밀하게 분류하고 있는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공예품뿐만 아니라 건축자재도 만들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의 발명품이 전 세계로 확산 되어, 나날이 재앙이 되고 있는 플라스틱 폐품을 멋지게 재활용 처리할 수 있게 되면 분명 세상은 더 나아질 것입니다.

두 번째 연사는 시리아 내전을 통해 유명해진 '화이트 헬멧' 창설자 라에드 알-살레(Rayd Al-Saleh)입니다. 2011년 시작된 전쟁으로 남녀노소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자 2013년 평범한 직장인이던 이분이 나서서 20명의 자원봉사 민간구조대를 만들어 흰 헬멧을 쓰고 민간인 구조를 시작하였습니다. 화이트 헬멧은 얼마 안 가 시리아 내전 지역 전체에 걸쳐 3천여 명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들이 구한 생명은 11만 5천여 명에 이릅니다. 이들의 모토는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은 전 인류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말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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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말로만 인도주의, 인권보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내자는 것이 이들의 목표라는 것이죠. 그야말로 몸을 던져 이 시대를 살아나가는 영웅들입니다. 이분이 한 말이 여전히 제 머릿속을 맴돌고 있습니다. "나쁜 정치인들은 참지 말고 나서서 맞서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그의 나라인 시리아에서 나쁜 지도자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시민이 죽어야 했습니까. 이들은 '헬프 시리아!'라는 구호기금도 운영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기부를 해오고 있으며 저도 작년에 이어 올해도 약간의 기부를 하고 나서 마음이 좀 가벼워지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물질적 이득이나 명예가 아니라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아무런 대가 없이 나름의 창의와 재능을 발휘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번 평창 대회에는 102개 국에서 천여 명이 참가하였는데 이들 전부가 공익활동가들입니다. 아프리카에서만도 천 2백여 팀이 참가 신청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팀만 올 수 있었습니다. 아프리카를 포함, 전 세계에서 5천여 팀이 참가 신청을 했다는 것은 한편으로 우리나라가 매력적인 나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특수한 경우를 빼고는 현지 체류비용 외에 다 자비부담으로 참가합니다. 이 많은 사람들을 삼시세끼 먹이고 숙소와 행사장 간 이동을 시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비빔밥, 김밥, 만두, 된장국, 미역국 등 간편 한식요리를 세련된 모습으로 내놓고 저녁에는 막걸리도 곁들였습니다. 물론 샌드위치도 있었지만 각국에서 온 참가자들은 맛깔나고 효율적으로 서브되는 한식류를 경이롭게 보면서 함께 먹고 마시면서 문화교류에 참가한다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예선을 통과한 40여 명 공익활동가들의 아이디어 경연 내용을 대충 소개하기만 해도 칼럼 몇 회분을 써야 할지 모릅니다. 일반 참가자 중 두 사람의 활동 내용만 소개하겠습니다. 전체 1등을 한 분은 자랑스럽게도 한국인 이상호 씨로서 30대의 이 활동가는 전쟁이나 재해로 인해 손이 잘려나간 절단 장애인들을 위해 3D 프린팅 전자 의수(義手)를 만들어 주는 일을 합니다. 실비 이하로 누구나 쉽게 자신에게 맞는 의수를 현지에서 만들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개발하였습니다. 그의 덕으로 쉽게 의수를 만들어 장애를 극복한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 있으며 그 수요도 늘고 있는데 이는 참으로 인류애가 밑바탕이 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다른 한 분은 아프리카의 중년 여성인데 그의 미소가 바이러스처럼 현장을 돌던 모습이 저의 기억 속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에세남 리야도르(Esenam Lyador)라는 가나 여성으로서 '미스 가나 택시'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답니다. 그는 여성차별로 인해 여성의 운전직 진입 장벽이라는 현실에 막혀 좌절해 있다가 용기를 내 일어나서 이를 변화시킬 프로젝트를 주도하게 됩니다. '그녀, 도시를 운전하다' 라는 프로젝트를 창시하여 여성들에게 직업 운전사가 되기 위한 무료 훈련과 자원을 제공하면서 그들의 경제적인 자립을 돕고 있습니다. 가나를 넘어 아프리카 각국을 돌면서 여성의 능력 향상을 위해 재능을 기부하고 있는 것이죠. 그의 활동 덕으로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에서 여성 버스 운전사가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아프리카 여성의 의식 계발과 능력 향상에 크게 기여한 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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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각자의 주변을 돌아보면 말없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공익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과연 세상이 더 나아질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전에도 이런 분들이 많았을 것인데 세상은 별로 나아진 게 없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론 이런 분들마저 없었다면 세상은 더 못해졌을 것이 아닌가 하고도 생각합니다. 월드컬처오픈이 벌이고 있는 더 나은 세상 만들기 운동은 이런 사람들이 서로 격려하고 배울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고 나아가 곳곳에서 더 많은 공익활동가가 나오도록 장려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한 플랫폼으로서 평창 행사와 같은 대회를 조직해 오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런 일을 계속해나갈 것입니다.

이번 대회에서 오간 대화 중 지금까지 잔잔하게 울려오는 말들이 생각납니다. 한 스푼의 변화가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말, 한 사람이 꿈꾸면 꿈일 뿐이지만 만인이 꿈꾸면 현실이 된다는 말,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말 등입니다. 저 스스로는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면서, 뭐라도 나부터 하지 않으면서 세상이 나아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에 또 한 가지 특기할 일은 앞서도 잠깐 스쳤지만 아프리카에서 온 분들이 매우 활동적으로, 독특한 아프리카 춤을 비롯한 아프리카 문화를 많이 소개하면서 다른 참가자들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낙후된 것으로만 알고 있던 아프리카가 일어나서 세계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죠. 저는 이 현상이 다 함께 잘 사는 세상을 위해서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딱 한 가지만 덧붙인다면 평창이란 곳이 앞으로 더욱 뜨는 도시가 될 것이란 생각입니다. 평창(平昌)은 그 이름부터가 특별합니다. 평화롭고 창대하다는 뜻이죠. 이번 대회의 마지막 날에 있었던 교류의 밤(Social Night) 자리에서 평창 수제 맥주가 여러 가지 나왔는데 캐나다인이 평창에 와 살면서 작은 맥주 양조장을 차린 것입니다. 쓸모없는 땅으로 오래 지내왔던 평창 대관령 마을이 올림픽을 통해 세계와 만나던 모습의 연장이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그에게 물어보니 제법 많은 외국인들이 평창이 좋아 이주해 와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평창은 동계올림픽으로 더 유명해졌지만 그전에도 대관령음악제로 국제적 명성을 얻어왔습니다. 서울 등지에서 평창에 별장을 두거나 평창으로 아예 이주해오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평창과 같은 작은 도시들을 맑고 깨끗하게 유지하고 아름답게 꾸며서 후손에게 물려줄 책임이 있습니다. 이 또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있어 꼭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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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역임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고, 현재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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