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위안부의 가슴뭉클한 회상



문옥주는 일본군을 위안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처자를 두고 떠나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사들을 위해 노래를 불러 주었습니다.

그녀의 노래 솜씨는 일품이었습니다.

위안부에게는 대개 일본군 애인이 있었습니다.

문옥주에게도 야마다 이치로 라는 애인이 생겼습니다.

문옥주는 그와의 만남을 기다리며 위안부 생활을 견뎠습니다.

(반일종족주의 322페이지 내용)

"그래도 나는 젊은 여자애였다. 사랑도 했다.



어느 저녁 이미 몇명의 병사를 상대하고 난 뒤였던것 같다. 방밖으로 나와서 달을 보며 울고 있었는데 「야마다 이치로」가 서있었다. "조선에 있는 엄마가 보고 싶어요" 나는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이치로」는 "그렇겠지 이런곳에 와서 힘들지 나도 내일 최전방에 가게됐다. 부모님께 받은 이 목숨을 드디어 버려야 할지도 몰라 그래도 나는 일본인이니까 어쩔수 없지...그렇지만 당신은 조선인이니까 죽지는 마.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 조선으로 돌아가서 효도해"라고 했다.

우리는 둘이서 같이 울었고 함께 방으로 돌아가 술을 마시며 진심으로 서로에게 이별을 고했다. 2,3개월 후 「야마다 이치로」의 부대도 돌아왔다. 다행히 「야마다 이치로」는 무사했다. 돌아오자마자 바로 위안소로 와주었다.우리들은 서로 끌어안고 기뻐했다. 그런 날은 마츠모토의 공인 하에 위안소 전체가 야단법석이 되어 임시 휴업을 했다. 우리들도 그 자리에서 1원씩을 내서 잔치 준비를 도왔다. 우리들은 서로를 스짱이라고 부르는 사이가 되었다. 위안소에서는 연애를 하게 되면 다들 그렇게 불렀다. 우리들은 대체로 스짱이 한사람씩 있었다.



내가 연애를 시작하자 다른 병사들이 질투했다. 내 주의를 끌기 위해 먹을 것이나 작은 선물을 가져온 병사도 있었지만 그런 것이 다 귀찮았고 괴로웠다. 그러다 보니 우리 둘사이가 군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래서 「야마다 이치로」가 내방에 와 있을 때에는 다음 병사가 다른 방으로 들어가거나 해서 배려해 주는 일도 있었다.

주위에는 몇천명의 남자들이 있었지만 그때 나에게는 「야마다 이치로」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순수했고 세련됐고 친절했고 익살스럽고 거기다 똑똑한 남자였다. " 「야마다 이치로」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한국인 위안부 문옥주 일대기 86페이지 내용)

「야마다 이치로」가 어느날 전쟁이 끝나면 일본에 가서 같이 살자고 하기에 "나는 조선인이니 조선으로 돌아가야 해요. 그럴수는 없어요"라고 했다. 그러자 "그렇다면 내가 조선으로 가지. 당신이 일본인이 되어도 좋고, 내가 조선인이 되어도 좋아.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잖아. 넌 바보구나"라고 하면서 「야마다 이치로」는 울었다. 나는 지금도 이 말을 절대 잊지 않는다. 야마다 이치로는 정말 좋은 남자였다.

1996년 문옥주가 사망하자 그들은 그녀를 민족의 성녀로 부추기면서 해마다 추모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과연 그녀는 민족의 성녀였던가요.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고, 그리하여 비천했던 집안이 자신에게 강요한 기생이란 직업에 충실하고, 나아가 남의 자식을 네 명이나 키웠던 성실하고 영민하며 용감한 여성이었습니다. 민족의 성녀는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죽기 얼마 전 그녀를 찾은 모리카와 마치코에게 꺼져가는 목소리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였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열심히 위안부 생활했어.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겼어. 대구에 돌아와서도 얼마나 뼈 빠지게 일했는데. 가족을 얼마나 보살폈는데. 필사적으로 돈을 모았어. 남자들은 왜 그런지 나를 좋아했어. 사람들은 말했어. '당신은 눈이 동그란 것이 아주 예뻐.' 내 목소리는 맑고 예뻐서 높은음도 잘 낼 수 있었어. 내 노래는 일본 군인들을 즐겁게 했어. 나는 군인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이 싫지 않았어. 야마다 이치로는 좋은 사람이었어. 그만이 아니야, 좋은 사람이 많이 있었어. 모두 불쌍한 사람들이었어.」

그렇게 그녀는 죽는 날까지 결코 일본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양반 나부랭이들이, 직업적 운동가들이 품은 반일 종족주의의 적대 감정과는 거리가 먼 정신세계였습니다.

(반일종족주의 338페이지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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