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망하는 한국경제] 기업들 도피하듯 '탈한국'…1분기만 16조 빠져나갔다


위기의 메이드 인 코리아

     CJ제일제당은 지난 2월 미국 냉동식품 기업 슈완스컴퍼니를 16억7800만 달러(약 1조9500억원)에 인수했다. 1952년 설립된 슈완스컴퍼니는 미국 수퍼마켓 어디서나 찾을 수 있는 냉동피자로 유명하다. 미국 내 17개의 생산시설과 전국적 물류·영업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다.

CJ가 인수한 미국 슈완스컴퍼니 냉동차량/fleetowner.com
 
해외직접투자 규모 역대 최대
“관세·물류비 고려 시장 가까이로”
최저임금 인상, 규제 등도 원인

내수 식품기업인 CJ제일제당의 대규모 글로벌 인수·합병(M&A) 배경은 뭘까. 이 회사 관계자는 “국내 생산시설을 늘리는 대신 해외에 진출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제조업과 유통업의 중간에 있는 회사다. 한계에 도달한 국내 시장 대신 세계 최대 식품시장인 미국에 거점을 마련하는 것은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설명했다. 


 
‘메이드 인 코리아’가 매력을 잃고 있다. 기업들의 탈(脫)한국 속도도 빨라지는 추세다.
 
한국 경제는 전통적으로 수출 제조업이 이끌어왔다. 질 좋은 노동력과 창의성을 바탕으로 섬유·신발(1970년대), 철강·기계(1980년대), 전자·자동차(1990년대), 휴대전화·반도체(2000년대) 등 주력산업을 개척했다. 제조원가 상승과 보호무역주의 강화 속에 기업들의 ‘오프쇼어링(off-shoring·생산설비와 일자리를 해외로 이전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한계에 도달한 한국 시장 대신 더 큰 시장 개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여기에 고질적인 한국의 고비용 구조, 주 52시간 제도, 최저임금 인상 등 원가경쟁력 약화와 혁신성장을 가로막는 규제도 기업의 등을 해외로 떠미는 원인이다.

올 1분기(1~3월) 한국 대기업의 해외직접투자(ODI) 규모는 102억 달러(약 11조8000억원)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제조업 해외직접투자(57억9000만 달러)는 전년 동기보다 140.2%나 늘었다. 반면 외국인직접투자(FDI)는 올 1분기 전년 동기 대비 35.7%(신고 기준)나 줄었다. 외국인 투자기업에 대한 조세감면제도가 지난해 말 종료된 것도 원인이지만 더는 ‘메이드 인 코리아’가 매력적이지 않다는 방증이다. 


 
CJ제일제당 외에도 LG전자와 롯데케미칼이 미국 테네시주와 루이지애나주에 생산설비를 완공했다. 미국에 한국 기업으로는 사상 최대 규모인 31억 달러를 투자한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초청으로 백악관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국 규제 많고 원가경쟁력 없다” 올 외국인 직접투자도 36% 감소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SK이노베이션은 조지아주에 자동차용 배터리 공장을 짓고 있다.
 
기업이 이런 투자를 하는 건 트럼프 행정부의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에 따라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됐고, 고율 관세를 부담하는 것보단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 생산시설을 갖추는 게 제조원가를 줄일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지리적으로 ‘극동(極東)’ 한국보다 물류비용이 적게 드는 것도 강점이다.
  


중소기업의 탈한국도 가속화하고 있다. 올 1분기 중소기업의 해외 직접투자액은 35억3500만 달러(약 4조1900억원)로 전체 ODI의 4분의 1을 차지했다. 기존 최대치인 지난해 3분기(28억3400만 달러)를 넘어선 역대 최대 규모다. 지난해 같은 기간(18억1100만 달러)과 비교하면 2배 가까이 늘었다.
 
연 매출 350억원을 올리는 중소 가전부품업체 A사는 2017년부터 베트남 현지공장을 가동 중이다. 2003년 중국으로 생산시설을 옮겼고, 한·중 관계 불안정과 납품 대기업 이전에 따라 베트남으로 갔다. A사 관계자는 “한국의 원가경쟁력은 떨어진 지 오래됐다”며 “아세안 지역의 관세 혜택을 볼 수 있고, 급성장하고 있는 동남아 시장 접근성이 높은 것도 베트남의 강점”이라고 말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전문가는 제조업의 탈한국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분석한다. 국내 고용유발이나 연관산업에 기여할 수 없는 건 사실이지만, 경쟁력을 갖추고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선 대기업·중소기업 모두 시장에 가까운 쪽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선진국으로 오프쇼어링하는 것은 시장 개척, 개발도상국으로 가는 건 원가경쟁력이 가장 큰 원인”이라며 “현지에서 만들어 팔면 물류비용을 줄일 수 있고 관세 장벽도 해소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실시로 원가경쟁력이 악화하고 각종 규제가 해소되지 않으면서 ‘기업하기 힘든 환경’이 개선되지 않는 것도 탈한국 가속의 원인으로 꼽힌다.
 
이두원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내 투자 환경이 나빠지면서 ‘도피하듯’ 해외로 나가는 게 더 큰 문제”라며 “국내에서 비교우위를 가진 신(新)산업에 투자가 몰리고, 제조업 투자는 줄어드는 투자 양극화가 국내 고용의 질과 양을 모두 악화시킨다”고 지적했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원자재 비용, 공장 부지나 건설 비용까지도 해외가 더 저렴하니 한국 기업이라 해도 한국은 더는 매력적인 투자처가 아니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강성진 교수는 “한국의 FDI 지원책은 제조업 중심인데, 원가경쟁력이 없는 한국 시장에 외국 제조기업이 들어올 리 없다”며 “서비스산업과 신산업 중심의 투자 유지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동현·강기헌·오원석 기자 offramp@joongang.co.kr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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