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2시간제 1년] 기업 'R&D 심장' 불이 꺼졌다..."PM 5:30 칼퇴근"


흔들리는 미래 경쟁력

마곡단지 '산업 두뇌' 수만명
週52시간 후 90%가 정시퇴근
 
     지난 4일 LG그룹 ‘연구개발(R&D)의 핵심’인 서울 마곡동 LG사이언스파크. 오후 5시30분이 되자 1층 로비 보안검색대를 통해 직원 수백 명이 한꺼번에 밀려나왔다. ‘퇴근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LG전자가 입주한 W4동 로비의 한 경비원은 “연구원의 90% 정도가 오후 5시30분이면 ‘칼퇴근’한다”며 “밤늦게까지 회사에 남는 직원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8시쯤 불이 켜진 사무실은 10%대에 불과했다.

週52시간 후 90%가 정시퇴근
지난 4일 서울 마곡동 LG사이언스파크 앞에서 오후 5시30분 퇴근한 연구원들이 셔틀버스를 타러 가고 있다. 마곡동 일대는 이때부터 교통정체가 시작된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마곡R&D산업단지는 LG사이언스파크 연구인력 1만7000여 명을 포함해 롯데 코오롱 등 수만 명의 ‘산업 두뇌’가 일하는 국내 최대 R&D 기지다. 1년 전인 지난해 7월 1일 종업원 300인 이상 대기업을 대상으로 주 52시간 근로제가 시행된 이후 이곳 연구단지의 ‘불 꺼진 밤’은 일상이 됐다. 한 책임자급 연구원은 “주 52시간 근로제 시행 이후 내부 마감을 지키지 못하는 프로젝트가 부지기수”라며 “어쩔 수 없이 주 52시간제의 제약을 받지 않는 해외로 R&D 프로젝트를 옮기는 곳도 있다”고 말했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주 52시간 근로제를 R&D 분야에도 획일적으로 적용하면 미래 경쟁력이 뿌리째 흔들릴 것이라는 우려가 점점 현실이 되고 있다”며 “우리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일하는 해외 굴지의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어떻게 이길지 암담하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은 R&D 분야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주 52시간제 시행 이후 제조, 정보기술(IT), 유통, 서비스 등 각 분야에서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경제계에서는 주 52시간제 시행 이후 우리 경제가 ‘당뇨병’에 걸려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이 한계기업들을 ‘쇼크’ 상태로 몰아넣었다면, 주 52시간제는 기업들을 당장 앓아눕게 하는 중병은 아니지만 경제 활력을 떨어뜨리고 상시적 피로감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선택근로제·탄력근로제 확대 등 제도적 보완책은 국회에서 막혀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근로기준법 개정에 따라 오는 7월 1일부터는 300인 이상 사업장 중 버스운송업 우편업 방송업 전기통신업 등 21개 업종 1000개 사업장에서 주 52시간제 특례가 해제된다. 또 내년 1월부터는 50~299인 중소기업도 주 52시간 근로제가 적용돼 기업들은 비상이 걸렸다.

불 꺼진 마곡 사이언스파크 > 지난 4일 오후 8시30분쯤 서울 마곡동 LG사이언스파크 건물에 불이 꺼져 있다. 이 시간 불이 켜져 있는 사무실은 10%대에 불과했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주52시간제, 기업 활력 갉아먹는 '경제 당뇨병' 됐다"
국내 사모펀드(PEF) 운용사 대표 A씨는 얼마 전 중국을 찾았다가 국영 투자기관 회장으로부터 “한국이 중국보다 더 공산주의 국가 같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자본주의 최전선에서 분초를 다투면서 경쟁하는 투자은행(IB)업계에 주 52시간 근로제가 적합하냐”며 혀를 찼다. A대표는 “회장의 안내를 받아 사무실을 구경했는데 직원들 70%가 야근을 하고 있었다”며 “그때 시간이 새벽 1시20분이었다”고 말했다.



글로벌 IB 수뇌부는 최근 들어 한국을 부쩍 자주 찾는다. 한국 IB업계가 오는 7월 1일부터 주 52시간 근로제에 발이 묶이면 ‘일감과 인력 뺏어오기’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해서다. 반대로 한국에 진출한 외국계 IB들은 실무급 인력을 아예 홍콩으로 보내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IB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IB업계에서는 ‘한국이 미쳤다’는 표현도 서슴없이 나온다”고 꼬집었다.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져
주 52시간 근로제 시행 이후 ‘경제 당뇨병’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블루칼라(제조업)보다 화이트칼라(사무직) 쪽에서 더 많이 나온다. 사건을 맡으면 밤을 새워 일해온 대형 로펌 변호사들도 1주일에 52시간을 넘겨서 일하지 못한다. 로펌업계 1위(국내 변호사 기준) 김앤장 법률사무소와 2위 법무법인 광장이 대표적이다. 재량근로제를 도입하면 근무시간을 늘릴 수 있지만 이들 로펌은 소속 변호사와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대형 로펌의 한 대표변호사는 “미국이나 영국 변호사들은 의뢰인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24시간 대응체제를 갖추고 있는데 ‘후발사업자’인 우리는 주 52시간에 갇혀 있는 꼴”이라며 “만약 글로벌 기업들이 일감을 맡겨야 한다면 어느 나라 로펌을 선택하겠냐”고 되물었다.

기업들은 글로벌 경쟁력을 감안하지 않고 주 52시간 근로제를 무차별적으로 시행했다며 불만이다. 지구촌 정보기술(IT) 시장을 놓고 삼성전자와 다투는 미국 애플에서 연봉 10만달러 이상을 받는 직원들은 근로시간 제한 없이 일한다. 사무직 고액 연봉자에게는 근로시간 제한을 두지 않는 ‘화이트칼라 예외 적용(white collar exemption)’ 제도를 운용하고 있어서다. 미국은 기업의 법정 근로시간을 주 40시간으로 규정한 뒤 이를 초과하는 근무에는 시간당 임금의 50%를 더해주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고소득 사무직은 이마저도 예외다. 연봉이 4만7476달러(약 5613만원)를 넘으면 초과근무수당을 지급하지 않는다. 탄력적 근로시간제 또한 6개월~1년을 적용받는다. 한국의 탄력적 근로제는 3개월이다. 독일은 전문직 재량근로제, 일본은 기획업무형 재량근로제 등을 통해 연구개발(R&D) 종사자들의 자유로운 근무를 보장하고 있다.



4대 그룹의 한 최고경영자(CEO)는 중국 상하이의 화웨이 R&D 센터에서 목격한 푸드트럭을 잊지 못하겠다고 했다. “오후 8시30분이 되자 회사 안으로 푸드트럭들이 들어가더라고요. 야근하는 직원들을 위해 ‘야식 서비스’를 하는 거였습니다. 직원들이 트럭에서 과일과 음식을 포장해서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는데 식은땀이 흐르더군요.” 그는 “화웨이에서 갑자기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00명의 기술자를 모으는 데 딱 두 시간 걸렸다”며 “한국이었다면 주 52시간 근로제에 어긋날 수 있어 며칠은 걸렸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글로벌 기업들은 벌써 한국 기업 문화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다. 미국의 구글, 아마존 등과 거래하는 한 업체의 부장급 직원은 “최근 아마존 본사 직원에게 ‘한국인의 눈빛(태도)이 달라졌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신속한 일처리를 미덕으로 삼아온 한국인들의 업무 처리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지는 게 피부로 느껴진다고 하더라”면서 “칭찬은 아닌 것 같았다”고 씁쓸해했다. 이 회사의 임원은 “하버드대를 졸업한 글로벌 인재들도 하루 12시간씩 일하는데, 우리는 8시간씩 근무하면서 어떻게 구글, 아마존을 따라잡겠다고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업종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해야
해외에 10개 생산법인을 두고 있는 한 대기업의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유럽 법인 출장을 갔다가 법인장의 ‘푸념’을 한참 동안 들어야 했다”고 했다. 이 회사의 한국 본사는 오후 6시가 되면 컴퓨터가 자동으로 꺼지는 ‘PC 셧다운제’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본사 확인이 필요해 메일을 보내면 답변이 오기까지 꼬박 하루가 걸린다고 한다”며 “글로벌 현장은 ‘전쟁터’인데, 한국만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하소연하는데 할 말이 없었다”고 했다.

조선업 등 국내 산업 전반의 구조조정을 담당하는 국책 산업은행도 업무에 차질이 적지 않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구조조정안 데드라인이 코앞으로 다가와도 시간만 되면 컴퓨터가 무조건 꺼진다”며 “저녁엔 미리 프린트를 해두기 위해 바쁜 날이 많고, 야근을 하면서 이런저런 내용을 연필로 써놓곤 하는데 ‘이게 지금 뭐하는 일인가’ 싶을 때가 있다”고 말했다.



경제계에서는 적어도 부가가치가 높은 사무직에 대해서는 서둘러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 원장은 “키는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커지는 것인데 선진국의 키가 크다고 억지로 키를 늘린 셈”이라며 “주 52시간제를 일률적으로 강제할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그런 환경을 만들어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고재연/신연수/박종서/이지훈 기자 yeon@hankyung.com 한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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