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의 하회마을, 체스키크룸로프 VIDEO: Cesky Krumlov


체코의 하회마을, 체스키크룸로프(Cesky Krumlov)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동유럽


  박물관의 왼쪽 편으로는 모차르트광장이 있다. 잘츠부르크박물관 옆에 자리한 모차르트 광장은 1842년 나폴레옹전쟁으로 사회적 여건이 어려운 가운데 공개되었다.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잘츠부르크박물관과 모차르트 광장 출처 The Better Living Index


edited by kcontents


광장 가운데 세워진 기념조형물은 루드비히 슈반틀러(Ludwig Schwanthaler)의 작품이다. 광장은 17세기 초반 라이테나우 대주교의 명에 따라 정비된 대성당의 일부였다. 광장 예정지 가운데에는 성 미카엘의 동상이 있는 바로크양식의 분수대가 있었다. 잘츠부르크는 이 분수대를 이전할 비용을 마련할 형편이 되지 않아 골머리를 앓던 중 잘츠부르크를 사랑하고 모차르트를 경애하는 바바리아의 루드비히 1세 왕이 기금을 내놓아서 공사가 가능해졌다. 


잘츠부르크박물관(좌), 박물관 옆에 있는 모차르트광장. 모차르트의 동상이 가운데 서 있다.(우)


원래 1841년에 완공할 예정이었지만, 바로크 양식의 분수대 아래에서 로마시대의 모자이크가 발견되는 바람에 연기되었다. 모자이크에는 “hic habitat (felicitas), nihil intret mali”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우리말로 옮기면 ‘(행복이) 여기 살고 있어 악이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1) 모차르트가 행복전도사가 되는 셈인가?


모차르트광장까지 돌아본 다음에는 게트라이데가세(Getreidegasse)로 돌아가 제대로 거리구경을 하기로 했다. 게트라이데거리는 ‘곡물 골목’이라고 번역되는데, 구 시가지에 있는 이 보행자골목은 1150년경 ‘속보(速報)골목’이라는 의미의 트라베가세(Trabegasse)라는 이름을 처음 얻었다. 이 길이 잘츠부르크의 역사적인 무역센터로부터 북서쪽에 있는 뮐른(Mülln)으로 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어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14세기 무렵 대주교로부터 매매에 관한 권리를 부여받으면서 상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 거리에 있는 많은 건물들은 그림 같은 통로와 안뜰이 있다.


게트라이데가세의 상점. 슈나이더라는 가게는 시계를 판다.(좌), 수공예품을 파는 가게는 1865년에 문을 열었단다.

(우상), 우산을 파는 가게는 앙증맞다. 건물 안뜰로 들어가는 통로에도 작은 점포가 있다(우하)


길 양편에 어깨를 좁히듯 좁게 들어선 건물들의 1층에는 크고 작은 가게가 들어있는데, 안뜰로 들어가는 통로에 판매대를 둔 작은 가게도 많았다. 다양한 상품들을 팔고 있는 가게들이었지만, 꼭 같은 특징이 하나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거리 쪽으로 내건 조그만 간판에 무엇을 파는 가게인지 표시가 되어 있었다. 옛날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상술이 전통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 우산가게가 눈길을 끌었다.


1987년 이래도 매일 갈색 바구니에 인형을 담아들고 나와 판다는 ‘인형아주머니(Marionettenfrau)’는 시간이 맞지 않았는지 보지 못했지만, 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나와 같은 구경꾼도 적지 않았겠지만, 무언가 살 것을 찾아 나선 사람들도 적지 않아 보였다.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출발에 앞서 화장실도 다녀올 겸해서 면세점으로 갔다. 쌍둥이로 유명한 독일 브랜드의 과도가 아주 싼 값이라서 샀는데, 독일산이 아니라 중국산이었다. 싼게 비지떡이었던 셈이다.


쇼핑을 마치고 다음 일정인 체코의 체스키크룸로프(Český Krumlov)를 향하여 출발한 것이 10시20분이니 잘츠부르크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1시가 되기 조금 전에 오스트리아-체코 국경을 통과했다. 유럽을 여행할 때는 언제 넘어가는지도 모르게 국경을 넘어가곤 하는데, 시간을 특별하게 기억하게 된 것은 국경수비대 대원이 버스에 올라와 검문을 했기 때문이다.


체스키크룸로프에 도착한 것은 1시경, 마침 비가 멎었다. 체코의 남부 보헤미아에 있는 체스키크룸로프는 2017년 기준으로 1만3천명이 사는 조그만 마을이지만, 체코에서 두번째로 큰 체스키크룸로프성을 중심으로 한 마을 전체가 199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체코어로 체스키(Český)는 보헤미아를 의미한다. ‘비뚤어진 초원’이라는 의미의 독일어 크룸베 오우베(krumbe ouwe)에서 유래한 체코어 크룸로프(Krumlov)는 ‘강 만곡부의 습지’를 나타낸다. 블타바(Vltava)강이 감아드는 모습에서 온 것이리라. 1240년 보헤미아의 귀족 비츠코브시(Vítkovci) 가문이 정착했고, 크룸베노베(Chrumbenowe)라는 이름의 요새가 언급된 것은 1253년이라고 한다. 이 마을은 보헤미아왕국의 중요한 무역통로 상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1302년 비츠코브시 가문이 대가 끊기자 보헤미아의 바츨라프2세(Wenceslaus II)왕은 로젠버그(Rosenberg)가에 성과 마을을 하사했다. 로젠버그가의 페터1세가 14세기 초에 윗쪽의 성을 세워 살았다. 당시 대부분의 주민은 바이에른에서 이주해온 독일계였는데, 특히 15세기 후반에 인근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독일에서 온 광부들이 정착하면서 체코인들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했다. 로젠버그가문은 무역과 수공예를 장려했다. 16세기 말에 로젠버그 가문의 윌리엄이 크룸로프성을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축하였다. 1602년 윌리엄의 동생 페터 보크(Peter Vok)는 성과 마을을 합스부르크제국의 루돌프2세 황제에게 팔았다. 보헤미아의 반란 당시의 화이트 마운틴 전투 후인 1620년에 페르디난트2세 황제는 성과 마을을 에겐베르크(Eggenberg) 가문에 하사하여 크룸로프 공작령이 되었다. 1719년부터 1945년까지 성은 슈발츠바르첸베르크(Schwarzenberg) 가문의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성의 마지막 소유자였던 아돌프 슈바르젠베르크(Adolph Schwarzenberg)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에드바르트 베네스(Edvard Beneš이 성에 머물면서 나치독일의 침략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결국 1940년 게슈타포가 성을 압수하였고, 종전 이후 1945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성을 압수하였다.


체스키크룸로프성에서 굽어본 마을, 블타바 강이 마을 감싸고 도는 모습이 딱 하회마을 닮았다


체스키크룸로프성은 마을 크기에 비하여 아주 큰 성이다. 커다란 바위 위에 세워진 성곽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인상적이며, 성 안에는 커다란 로코코양식의 정원이 있다. 오랜 세월을 두고 건축이 이어졌기 때문에 다양한 건축양식을 볼 수 있다. 바로크양식으로 지어진 극장은 에겐베르그 가문의 소유이던 1680-1682년 사이에 지어졌다.(2) 체스키크룸로프성에 올라 마을을 굽어보면 전체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아담하다. 성 아래로 블타바 강이 마을을 감아 도는 모습이 꼭 안동의 하회마을처럼 예쁘다. 성내에 있는 건물내부는 따로 구경하지는 못했지만, 건물 벽을 장식한 벽화가 고졸한 느낌을 준다. 언 듯 보면 입체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평면을 입체적 공간으로 인식하도록 착시를 일으키는 스크라비토 건축기법을 적용한 것이라고 한다. 마을로 건너가는 다리에서 성을 올려다보니 커다란 바위에 의지해서 성을 지은 것을 알겠다.


체스키크룸로프성은 오랜 세월을 두고 이어지었다. 바위 위에 지은 성의 왼쪽으로는 망토의 다리가 보인다(좌), 

성의 회랑에는 스크라비토기법으로 지은 건물이 입체적으로 보인다.(중) 라브레지키다리 건너편에 있는 성에는 

사방을 돌아볼 수 있는 흐라데크 탑이 솟아있다.


체스키크룸로프성을 나서면 라트란거리를 지나 작은 나무다리를 건너면 구시가지로 들어간다. ‘이발사의 다리’라고도 하는 라브제니키 다리(Lazebnicky most)이다. 다리 양편에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과 성 요한 네포무크의 동상이 서 있다. 이발사의 다리라고 하는 이유는 17세기에 일어난 비극과 연관이 있다. 라트란거리가 다리와 닿는 곳에 하얀 집이 하나 있는데 이 집이 이발소였다고 한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황제였던 루돌프2세 황제의 아들 줄리어스 세자르가 정신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체스키크룸로프성에 머물고 있을 때, 이발사의 딸과 사랑에 빠졌고, 그 사랑은 비극으로 끝났던 것을 사람들이 기억하기 위하여 ‘이발사의 다리’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라브제니키 다리에 서 있는 예수상. 뒤편으로 보이는 집이 이발사의 집이다.


신성로마제국의 루돌프2세 황제는 오래된 궁녀 카테리나 스트라다(Catherina Strada) 사이에 돈 율리우스 카이사르 디부아르 오스트리아(Don Julius Caesar d'Austria)라는 이름의 사생아를 얻었다. 사생아라고는 하지만 왕자였기 때문에 황제는 체스키크룸로프성을 사서 왕자에게 주었다. 1605년부터 성에서 살기 시작한 왕자는 1607년 어느 날 이발사의 딸 마르케타 피클레로바(Markéta Pichlerová)를 부모의 동의를 얻어 초대했다. 조현병을 가지고 있던 왕자가 마르케타를 보는 순간 발작을 일으켜 그녀를 두들겨 팬 끝에 죽었다고 생각하고는 창밖으로 내던졌다. 다행히 그녀는 목숨을 구했다. 그녀가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왕자는 그녀를 또 보내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이를 거절하자 그를 감옥에 가두는 바람에 그녀는 다시 왕자에게 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1608년에 왕자는 마르케타를 살해하고 신체를 조각내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황제는 왕자에게 종신형을 선고하였고, 왕자는 1609년에 감옥에서 죽었다.(3)


린다 라퍼티(Linda Lafferty)는 자신의 소설<사혈치료사의 딸>에서 이 비극을 다루고 있다. 1606년 프라하의 궁정에 머물던 루돌프2세 황제는 망나니짓을 하는 왕자 돈 줄리우스(Don Julius)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황제는 광기에 휩싸여 끊임없이 비행을 저지르는 젊은 왕자를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해야 했다. 결국 보헤미아에 있는 피클러(Pichler)라는 이름의 사혈치료사에게 보내 정신병을 치료하도록 한 것이다. 피클러는 딸 마르케타(Marketa)를 조수로 썼고, 결국 왕자와 마르케타 사이에 합스부르크왕조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살인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이다.(4)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중세 유럽의 이발사는 이발만 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외과의사 역할도 했다는 점이다. 지금도 이발소에서 보는 빨강, 파랑, 하양의 삼색 줄로 된 표시는 동맥, 정맥, 붕대를 나타내는 것이다.


체스키크룸로프(Cesky Krumlov) 위치도 출처 구글맵

edited by kcontents


다리를 건너 구시가로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우리가 점심을 먹은 식당은 4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고 하는데 좁은 공간을 잘 활용하여 식당을 꾸몄다. 점심메뉴는 비엔나에서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스프에 이어 접시 하나에 담긴 4인분의 음식에서 각자 몫을 덜어 먹었다. 햄 고기 다진 것을 납작하게 부쳐낸 것, 우리네 떡 비슷한 것, 이것저것을 넣어 부친 전 같은 것, 그리고 구운 닭고기를 담았고, 역시 토마토와 어슷하게 썬 오이가 한 쪽 그리고 채로 썬 야채를 곁들였다. 스프는 익숙하지 않은 향신료 때문에 오묘한 맛이었고 주 메뉴는 물기가 없어 퍽퍽했다. 그런대로 요기는 되었지만 맛있다는 느낌은 없다. 하긴 인솔자의 말대로라면 7유로짜리 식사에서 너무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참고자료:

(1) Visit Salzburg.net. Mozartplatz Square.

(2) Wikipedia. Český Krumlov.

(3) Wikipedia. Don Julius Caesar d'Austria.

(4) Kiss Library. The Bloodletter's Daughter (A Novel of Old Bohemia)

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yang412@hiramail.net

청년의사



kcontents

그리드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