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의 과제 [임종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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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의 과제

2016.06.03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별호가 ‘기름칠한 장어’인 것은 기자들에게 말꼬리를 잡히지 않고 잘 빠져나가는 능란한 외교 수사(rhetoric)가 얄밉다는 뜻입니다. 기자들 사이에서 반 총장을 비유하는 유사한 말로 "반 장관의 브리핑엔 해설 자료만 있지 스트레이트가 없다"도 있습니다.

지난 5월 25일부터 30일까지 방한 일정에서 반 총장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든 매스컴의 톱뉴스가 됐습니다. 그가 모처럼 외교 수사가 아니라 솔직 어법으로 차기 대선출마와 관련한 자신의 속내를 드러냄으로써 스트레이트는 물론 해설자료까지 풍성하게 제공한 셈입니다.

그가 대선 후보의 등용문으로 평가되는 관훈토론회 참석을 방한 일정의 시작으로 잡은 것부터가 매우 정치적 행보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자신에게 씌워진 ‘장어’이미지를 벗고, 기자들에게 진 빚을 갚기라도 하려는 듯 대선 출마 의지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발언들을 쏟아냈습니다.

"사무총장 임기를 마치고 대한민국 시민이 되는 내년에 할 일을 고민하겠다"는 말로 시작해서 ‘대북관계에서 자신의 능력’ ‘통합의 리더십을 필요로 하는 한국정치’ ‘미국 대선 후보들의 나이도 70대’ 등의 발언이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들렸던가 봅니다.

28일에는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를 만났고, 국가원로들과 만찬도 가졌습니다. 29일에는 안동, 30일엔 경주를 방문했는데 언론들은 JP를 만난 것과 대구경북(TK) 지역 방문을 연결시켜 반총장의 출신지인 충청과 TK의 지역연합 시도라고 지레 추측했습니다. 반 총장이 대선후보를 꿈꾼다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그 점일 것입니다.

현실정치의 필요에 의해 지역연합이 불가피할 수도 있지만 다른 지역을 배제하는 방식의 지역연대는 금물입니다. 그것은 그가 말하는 통합의 리더십과도 맞지 않고, 국제간의 분쟁을 조정하는 유엔사무총장의 역할에 비추어서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자신에게 반대하는 지역이 있더라도 끝까지 설득하고 포용해야 할 것입니다.

반 총장에게 부여된 시대의 요청이 있다면 그런 통합의 리더십과 기성 정치의 개혁입니다. 그가 말했듯이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남북이 갈린 것으로 모자라 남한은 동서로 갈려서 반목 질시하고 있는 것은 부끄럽고 창피한 노릇입니다.

아직 그의 출마 여부를 논할 단계가 아니기에 그가 어느 당을 선택할 것인지를 말하기는 어렵지만 4·13총선 패배로 후보감이 줄줄이 낙마한 새누리당의 후보가 될 공산이 커진 게 사실입니다. 관리 출신 대선 후보들이 대개 여당을 택하고, 경선 대신 추대를 선호한다는 말들이 그런 추측의 뒤를 따릅니다.

사실 반 총장은 노무현 정부에 의해 외교부장관으로 발탁됐고, 노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지로 유엔사무총장으로 당선됐습니다. 지금의 더민주당과 국민의당 두 야당은 4·13총선 승리로 기세가 올라 자력으로 정권교체가 가능할 듯이 의기양양이지만 과거 야당 시절에는 반 총장을 후보로 영입하자는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반기문은 여야를 막론하고 대선후보로 탐내는 희귀한 존재입니다.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일찍이 그런 정치인은 없었습니다. 분단국 출신으로 유엔사무총장에 선출된 것 자체가 반 총장 개인은 물론 국가적인 행운이었습니다. 대륙 간, 국가 간 경쟁을 거쳐 선출되는 유엔사무총장을 한국이 다시 배출하려면 적어도 몇 백 년은 걸려야 할 것입니다.

반 총장의 대선출마를 반대하는 의견 가운데는 타락한 한국정치에 뛰어들어 유엔사무총장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것에 대한 염려도 있습니다. 그것을 가장 심각하게 걱정하는 것이 반 총장 본인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외교장관과 유엔사무총장으로서 그가 쌓은 경륜을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데 쓰도록 하는 게 좋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을 것입니다. 국익의 추구가 본질인 외교에서 국가원수 간의 친교의 중요성은 긴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반 총장이 지닌 그런 탁월한 경쟁력을 사장시키는 것은 국가적인 손실일 수도 있습니다. 야당들이 정파적인 이유로 반 총장의 출마에 반대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격을 하기 전에 자신들은 국가의 발전을 위해 무엇을 했고, 어떤 경쟁력을 가졌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야당은 '미래의 정적'을 이유로 근거 없는 인신공격을 일삼아서는 안 됩니다. 더민주당의 이종걸 원내대표가 “반 총장이 출마하면 시궁창에 버려질 이름이 될 것이다” 운운한 것은 자신의 입과 가문을 시궁창에 빠뜨린 발언이라고 하겠습니다. 게다가 예수를 판 가롯 유다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했다니 시궁창 정치의 막장을 보는 것 같습니다.

반 총장이 어느 당을 선택하든 후보가 되는 과정은 가장 민주적인 방법과 절차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추대와 옹립은 악마의 유혹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의혹 제기에도 은폐하려 해서는 안 될 것이고, 구차하게 변명해야 할 과거가 있으면 아예 포기하는 게 낫습니다.

이번 방한이 너무 국내 정치적 행보였다는 비판이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제기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남은 6개월은 국내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유엔사무총장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는 데 집중돼야 할 것입니다.

한반도의 평화는 그 중에서도 최우선의 과제가 돼야 할 것입니다. 남한 출신의 사무총장이 임기 중 한 번도 북한을 방문하지 못한 것은 임기 내내 유엔제재를 초래한 북한의 도발 탓이긴 하지만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남은 임기 중에라도 그가 남북관계 개선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기 바라며 야당들도 반 총장의 그런 행보를 정파적 시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6개월 뒤 그가 내릴 결정이 어떤 것이든 국민이 행복한 결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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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종건

필자는 1970년 중앙대 신문학과를 나왔으며 한국일보사와 자매지 서울경제의 여러 부서에서 기자와 데스크를 거쳤고, 서울경제 논설실장 및 사장을 지냈습니다.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 위원 및 감사를 지냈고, 일요신문 일요칼럼의 필자입니다. 필명인 드라이 펜(Dry Pen)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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