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사회인가? [이성낙]

www.freecolumn.co.kr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사회인가?

2014.09.23


근래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볼썽사나운 현상을 보노라면 프랑스 시인이며 수필가이자 철학자인 폴 발레리(Paul Valry, 1871~1945)가 남긴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행동하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명언이 떠오르곤 합니다. 오늘날의 우리를 두고 한 고언(苦言)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른바 사회 지도층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쏟아내는 막말 행태와 부정부패 현상을 지켜보노라면 발레리의 명언이 더욱더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 사회에는 한때 “‘사바사바’하면 안 될 일이 없다” 같은 말이 범람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아울러 “맨입으로는 안 된다”는 말도 유행했습니다. 요컨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바사바’하려면 검은 돈, 즉 ‘와이로(わいろ)’가 필요하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서글프게도 당시 어른은 물론 청소년조차도 이런 언어를 스스럼없이 사용할 정도였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사바사바’, ‘맨입으론 안 돼’, ‘와이로’ 같은 말은 그때의 우리 사회상을 적확히 풍자하는 생활 용어의 한 코드였습니다.

그런 생활 언어의 오염에서 필자도 예외일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1960년대 초 유학 시절의 일입니다. 필자에게 남달리 많은 도움을 주던 독일인 친구가 하루는 사소한 도움을 청했습니다. 필자는 물론 선뜻 도와주겠다고 답하며 아주 가벼운 우스갯소리를 했습니다. 억지로 짜깁기한 한국식 독일어로 “Mit leerem Mund(맨입으로)?”라는 말을 던진 것입니다. 그러자 친구가 어리둥절해하면서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 하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아차 하며 놀라고 당황한 것은 필자 자신이었습니다. 서둘러 “아냐, 아무것도 아냐. 내가 잠깐 헛말(Lapsus linguae)을 했어” 하고 얼버무리며 상황을 넘겼습니다.

그때 필자는 외국에 와서도 여전히 ‘맨입 타령’을 하는 자신이 놀랍고 어이없어 자책감에 빠졌습니다. 필자가 당시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사고방식에 얼마나 오염되었는지를 확인한 것 같아 한동안 스스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 이후 필자는 반세기를 넘게 살아오면서 한 번도 ‘맨입 사고’와 맥을 같이하는 “한턱내라” 따위의 말조차 능동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간혹 “내가 한의료계가 진취적이기 보다는 너무 수구적인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기까지 하였다.턱내겠다”라는 말을 하곤 했지만, 결코 필자가 먼저 “한턱내라”는 말을 입에 담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생각이 더욱 굳어진 데는 오래전 폴 발레리의 명언을 접한 것이 한몫을 했습니다. 그의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행동하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은 지구촌 모든 사람에게 던지는 충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아직 부정부패의 멍에(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사바사바’가 판을 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막말이 횡행하고 있으며, 차츰 그런 막말에 ‘익숙해져가고’ 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당면한 문제를 차분히 생각하며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큰소리부터 먼저 내는 ‘외침 행동’으로 선수(先手)를 치려는 분위기에 압도당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우리 국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국회에는 막말이 난무하고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검은 돈’에서 자유롭지 못한 의원들도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니 다른 막말 현장과 부패 현장을 어찌 탓하겠습니까.

폴 발레리는 ‘행동하는 대로 생각하는 사회’로 가서는 결코 안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필자는 우리 사회가 한시라도 빨리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는 차분한 사회’로 진화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촉구합니다. 이는 우리 국민의 자존심 문제이기도 합니다.

필자소개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의사평론가,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Copyright ⓒ 2006 자유칼럼그룹.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freecolumn.co.kr

 

그리드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