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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하면서 배운다고
2014.08.25
‘도깨비 감투’ 이야기가 있다. 어릴 적 만화를 좋아하던 나는 ‘도깨비 감투’ 만화책을 읽고는 현실이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진짜 그런 것을 한 번 가져봤으면 하고 조바심 나게 열망한 적이 있다.도깨비 감투를 쓰고 투명인간이 되어 맹랑한 일을 서슴없이 저지르고는 유유히 사라질 때면 영문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악동처럼 즐길 수 있을 거라는 상상도 짜릿했고, 지나가는 사람의 뒤통수를 한대 치거나 남의 물건을 ‘슬쩍’ 해도 도무지 들킬 일이 없으니 그야말로 도깨비 감투만 있으면 겁 없이 멋대로 행동하는 데 하등 제동 걸릴 일이 없을 거라는 유치한 발상에도 신이 났다. 요상한 것은 어차피 상상일 뿐인데도 어린 마음에도 그랬고 만화 줄거리도 그랬듯이 그런 물건을 손에 넣는다면 선행에 쓰기보다 남을 해코지하거나 재미 삼아 골려 줄 생각이 먼저 떠오르는 걸 보면 남다른 힘을 얻으면 못된 쪽으로 기우는 맘보가 참 고약하다 싶기도 했다. 세계 제일의 인터넷 왕국이라는 21세기 한국 사회에는 이야기 속에나 존재하던 ‘도깨비 감투’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도 어쩌다 굴러들어와 특정인의 소유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셀 수없이 많은 투명 감투들이 인터넷 사이트 곳곳마다 종횡무진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익명성이라는 도깨비 감투를 악용해 남을 악의적으로 해코지하고 상처를 낼 수 있는 음습한 사이버 공간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독기가 서리서리 뿜어져 나오는 사이버 공간은 음해와 비방, 명예훼손 등으로 뒤엉킨 투명인간들의 입김으로 혼탁하다.사이버 공간을 돌아다니는 도깨비 감투들은, 마치 굶주린 사자 앞의 먹잇감이 이리저리 살점을 뜯기며 갈갈이 해체될 때까지 희롱당하다 마침내 흔적도 없이 삼켜지고 말듯이, 올라온 글의 내용이나 본 뜻과는 아랑곳없이 오로지 그 글이 한 줄 한 줄 의미를 상실할 때까지 시비에 시비를 걸며 냉소적 이빨을 들이댈 뿐이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애교와 장난기 어린 감투 대신 현대의 감투들은 언어폭력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략)도깨비 감투를 언제까지 악용만 하다가 결국 사람들에게 곤욕을 치르고 마는 이야기 속의 결론에 도달하고 싶지 않다면 차라리 감투를 벗어서 얌전히 본래의 자리에 돌려놓을 일이다.
지난 번 칼럼 ‘포털 변소, 싸젖힌 댓글’과 ‘나는야, 조선족 사토라레’가 나간 후 10년도 더 전에 썼던 이 글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그간 ‘익명제’를 ‘실명제’로 전환시켜 정체가 노출될 수 있도록 감투에 ‘구멍’을 냈지만 이에도 아랑곳없이 폭력의 수위는 높아만 갑니다. 글 쓰는 후배 하나도 ‘댓글 테러’를 당했다며 의미 둘 가치가 전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허탈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왜 이렇게 난폭하고 이상한 사람들이 많을까 다시 곰곰 생각해 봅니다. 뭐 하나 되는 일도 없고, 할 일도 없이 무료한 세칭 ‘찌질이’들이 그런 댓글을 쓰고 다니니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주변의 위로를 뒤집어도 생각해 봅니다. 자기 자신과 현실에 좌절하고 낙망한 사람들이 흘러드는 곳이 그 마당이라면, 그 ‘퇴적 공간’에서 몸살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아우성을 ‘단순 찌질이들의 악다구니’로 치부할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대놓고 해코지는 못하고 시궁창 쥐새끼처럼 남의 발 뒷굼치나 갉죽거리는 족속들에게 차라리 측은지심을 가질 망정 말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몸서리나는 댓글은 어느 단편 소설 제목과 같이 소외되고 천대받으며 점점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모래톱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사회가 사분오열, 오리무중, 암중모색을 거듭하는 동안 그네들은 사회의 중심부에서 밀리고 밀린 퇴적층이 되어 댓글로나마 ‘악’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라면 참으로 가련한 일입니다. 어쩌다 보니 세 번 연속 인터넷 악성 댓글에 관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요 몇 달 새 일도 안 구해지고 글도 안 써지고.., 저 역시 도무지 되는 일이 없고 할 일도 없는 '찌질한 화상'이라 갑자기 악플러들과 동질감을 느끼게 되었나 봅니다. 욕하면서 배운다고 이러다 남의 글에 악성 댓글이나 '싸고' 돌아다니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필자소개
신아연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92년 7월, 호주로 떠났다. 시드니에서 호주동아일보 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으로 일하다 2013년 8월, 한국으로 돌아와 자유기고가,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중앙일보, 여성중앙, 과학과 기술 등에 에세이를 연재하며, KBS 라디오에 출연 중이다. 낸 책으로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이 있고, 2013년 봄에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를 출간했다. 블로그http://blog.naver.com/shinayo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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