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 발전사들 "전기 보낼 전력망 없어 파산 위기"...송배전망 구축 스톱 책임져야
민간 발전사들, 한전 제소한다
"전기 보낼 전력망 없어 파산 위기"
"송배전망 구축 안해 전기 생산·판매 못해" 공정위 제소
문 정권 때 이루어진 일
(편집자주)
삼성, 포스코 등 국내 대기업 계열 발전사들이 한국전력을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하기로 했다. 한전이 송배전망 구축 등을 제때 하지 않아 전기를 생산·판매하지 못했다는 이유다. 한전은 지난 문재인 정부 당시 탈원전에 앞장서며 200조원이 넘는 부채와 2021년 이후 누적 40조원을 웃도는 적자를 기록하면서 송배전망을 계획대로 건설하지 못했다. 전국 곳곳이 송배전망 문제로 몸살을 앓는 가운데 동해안 민간 발전업체들의 사정은 특히 심각해졌다는 지적이다. 수조 원대 투자를 해 발전소를 지어 놓고도 제대로 돌리지 못하다 보니 이대로 가면 올해 손실은 수천억 원대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한 업계 관계자는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발전소 건설은 프로젝트파이낸싱(PF) 등 차입을 활용하는 게 일반적”이라며 “발전소를 돌려 원리금을 갚아야 하는데 가동을 못하면 부도가 불가피하다”고 전했다.

‘을’인 발전사가 전기를 사 가는 ‘갑’ 한전을 제소한다는 것은 그만큼 절박한 이들의 사정을 보여준다는 지적이다. 민간 기업이 공공 역할을 하는 공기업을 상대로 제소하는 것도 이례적이다.
19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강릉에코파워와 삼척블루파워는 최근 한 법무법인과 1년여에 걸친 법률 검토를 마치고 공정위에 한전과 전력거래소를 불공정 행위로 신고하기로 결정했다. 강릉에코파워는 삼성물산, 삼척블루파워는 포스코인터내셔널이 각각 지분 29%를 보유 중인 대기업 계열사다. 한전이 전력망을 계획대로 건설하지 않고, 자회사인 한수원의 원전에서 생산한 전기는 집중적으로 사서 실어 나른 탓에 민간 석탄발전사들이 경영난에 처했으니, 송배전망 건설과 운영을 담당하는 한전 등에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최근 AI(인공지능)의 확산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현실에서 전력망 확충의 필요성이 날로 커지지만, 우리나라는 올해 상업 운전을 시작한 신규 발전소마저 송배전망이 없어 멈추는 상황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석탄화력발전소에 대한 환경 규제를 풀면서 전력 생산에 총력을 기울이는 미국과 대비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5조 발전소 첫날부터 못 돌려… 가동률 7%, 문 닫을 판
강원도 삼척에 있는 삼척블루파워 2호기는 올 1월 1일 상업 운전에 들어가자마자 가동을 멈췄다. 우선권이 있는 시운전 상태에서 상업 운전으로 ‘신분’이 바뀌자마자 순위가 밀리면서 발전기를 끈 것이다. 작년 5월 중순 상업 운전 직후 멈췄던 1호기는 9개월 만인 지난달 13일 다시 가동에 들어갔지만, 2호기는 아직까지 멈춰 있다. 1·2호기를 합쳐 3월 중순까지 이용률은 7%에 그친다. 2.1GW 규모 1·2호기 건설에 투입된 자금은 약 4조9000억원, 이대로 가다가는 올해만 3000억원 이상 손실이 예상된다.
강릉에코파워는 올 초 석탄화력발전소 2기용으로 석탄을 수입해 30일치를 보관했지만, 작년에 이어 올해도 이용률이 20%를 밑돌자 석탄에 물을 뿌리며 60일 이상 재고를 유지했다. 발전 지시를 내리는 전력거래소에는 “하루라도 더 때게 해달라”고 읍소하거나, 다른 업체에는 “하루이틀만 먼저 돌리겠다”고 부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간 발전사들이 생존의 위기에까지 내몰리자 결국 ‘공정위 신고’라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는 관측이 나온다.
지난해 동해안 석탄화력발전소들의 이용률은 평균 23%에 그친다. 60~70% 수준인 다른 석탄발전소의 3분의 1 수준이다. 현재 동해안에는 원전 8.7GW(기가와트), 석탄 7.4GW, 양수 1.8GW 등 약 18GW의 발전 설비가 갖춰져 있지만, 송전 용량은 11GW에 그친다. 7GW가량은 보낼 방도가 없어 멈출 수밖에 없는 것이다. 태양광이 몰린 전남, 풍력이 많은 제주 등도 억지로 발전기를 끄는 건 흔한 일이 됐다. 주민 민원에 막혀 수년씩 송배전망 건설이 늦어지는 현실을 감안하면 이와 같은 ‘송전 제약’ 문제는 나날이 심각해질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용률 7%까지… 파산 위기 몰린 발전사
이번 사태를 두고 곪을 대로 곪은 ‘송배전망 부족 문제’가 터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석탄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를 태백산맥을 넘어 수도권으로 보낼 방도를 정부도, 한전도 내놓지 못하자 사업자들이 나섰다는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1년 넘게 정부와 한전에 문제 해결을 요청했지만, 답이 없었다”며 “일정 비율이라도 돌리라는 식의 중재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민간 발전사들 사이에서는 “이용률이 40%는 돼야 손익분기점을 겨우 넘긴다”며 “이익은 안 나도 좋으니 제발 새로 지은 발전소를 돌리게 해달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현재 동해안의 주요 민간 발전사들은 매년 원금과 이자를 합쳐 수천억 원대 빚을 갚아야 할 형편이다. 강릉에코파워는 원금에 이자까지 매년 5000억원씩을 내야 하고, 삼척블루파워도 올해 상환해야 하는 원리금이 2300억원에 이른다. 한 업계 관계자는 “회사채 만기가 다 된 기업들이 여의도를 돌아다니고 있다지만, 재무 구조도 안 좋은 데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기준 때문에 석탄발전사에는 난색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며 “이대로 가면 연쇄 부도”라고 말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나?
애초 동해안과 수도권을 잇는 신규 송전선로는 2019년 준공 예정이었다. 2011년 9월 일어난 ‘블랙아웃(순환 정전)’ 이후 부족한 전기 생산을 빠르게 늘리기 위해 동해안에 민간 석탄화력발전소가 추진됐고, 그에 맞춰 실과 바늘처럼 송전선로도 만들기로 했다. 발전 능력은 원전과 비슷한 1GW에 이르면서, 환경 측면에서도 가장 최근에 건설된 삼척블루파워는 과거에 지은 발전소와 비교해 대기 유해 물질 배출이 10분의 1 수준에 그치다 보니 매력적인 대안으로 꼽혔다.
하지만 탈원전·탈석탄을 내세운 문재인 정부가 원전과 석탄이 몰린 동해안에서 수도권으로 전기를 보내는 송전선 건설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건설은 차일피일 미뤄졌고, 이젠 내년으로 예정된 준공 시점마저 더 미뤄질 가능성이 커졌다.
오는 9월부터 전력망특별법이 시행되지만 송배전망 건설에 일부 숨통만 트이는 것일 뿐 자금난에 시달리는 한전의 상황을 감안하면 근본적인 해결은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교수는 “이대로 두면 동해안의 신규 발전소들은 조만간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며 “송전선로가 완공되더라도 쓸모가 없게 되고, 전력 수급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송전제약·이용률
송전제약: 일반적으로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는 송전망을 통해 공장과 가정으로 보내게 되지만, 송전망 용량이 발전량보다 부족해지면서 과부하 등이 우려돼 발전소 출력을 줄이는 상황을 말한다. 마치 자동차를 대량으로 만들어도, 운송할 도로가 없어 공장을 멈추는 것과 같다. 최근 수년째 수도권 송전망 건설이 늦어지면서 동해안 화력발전소는 수차례 발전을 중단하는 송전제약을 겪고 있다.
이용률: 발전소의 최대 발전 능력 대비 생산된 전기의 비율. 1년 내내 가동했을 때 만들 수 있는 전기의 양에서 실제 발전량이 차지하는 비율을 말한다. 송전망 부족으로 송전제약이 수시로 발생하면서, 동해안에 있는 석탄화력발전소의 이용률은 최소 7%까지 떨어진 상태다.
조재현 기자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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