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최악의 범죄집단 '선관위'
중앙 간부부터 지역 직원까지
선관위, '부패 원팀'이었다
감사원 '채용비리 감사 보고서'
감사원이 적발한 선거관리위원회 고위직 자녀·친인척 채용 비리는 모두 지연(地緣)과 근무연(함께 근무한 인연)을 악용해 벌어진 것으로 드러났다. 연고지 지역 선관위 근무 때 형성된 인연을 통해 자녀·친인척의 채용을 청탁하거나 지시하고, 후배 공무원들이 여기에 호응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묶인 선관위 공무원들은 외부 감시에 파일 조작, 문서 파쇄 등으로 조직적으로 대응했고, 이 과정에서 서로 “너도 공범”이라고 말하면서 한배를 탔다는 의식을 키워간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선관위 직원은 부정 채용 수법을 사실상 ‘매뉴얼’로 만들어 공유하기도 했다고 3일 감사원은 밝혔다.

감사원에 따르면, 박찬진 전 중앙선관위 사무총장은 고향인 광주에서 선관위 공무원 경력을 시작해 광주선관위 관리과장을 거쳐 중앙선관위에서 장관급인 사무총장에 올랐다. 박 전 총장이 사무차장이었던 2022년 1월 전남선관위가 경력직 채용을 공고했고, 광주 남구청 공무원이었던 박 전 총장 딸이 지원했다. 전남선관위는 면접 위원들에게 점수란을 비워둔 점수표를 내게 했고, 여기에 박 전 총장 딸을 비롯한 ‘내정자’들이 합격하도록 점수를 써 넣었다.
전남선관위 직원들은 이 부정 채용 수법을 “★서류전형+면접 팁.txt”라는 파일에 적어 공유하다가, 감사원 감사가 시작되자 문제가 될 부분을 다른 내용으로 덮어씌웠다. 그러고는 서로 “너도 이것(파일)을 수정했으니 공범이다”라고 말했다.
부하 직원에 서류 조작하게 한 뒤 “너도 공범”
김세환 전 사무총장도 고향인 인천 강화군청 공무원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해 강화군선관위로 소속을 옮겼고, 이후 상급 기관인 인천선관위 관리과장을 거쳤다. 김 전 총장이 사무차장이었던 2019년 10월 중앙선관위는 인천선관위에 인력 소요가 없는데도 경력직 채용을 진행하게 했고, 김 전 총장과 마찬가지로 강화군청 공무원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한 김 전 총장 아들이 채용에 지원했다. 인천선관위는 면접 위원 전원을 김 전 총장과 함께 강화군·인천선관위에서 근무했던 직원들로 구성해 김 전 총장 아들을 강화군선관위에 채용했고, ‘5년간 다른 선관위로 이동 금지’라는 애초 채용 조건을 1년도 안 돼 풀어줘 인천선관위로 다시 옮길 수 있게 했다.
송봉섭 전 사무차장은 충남 태안 출신으로 충청 지역 선관위에서 근무하다가 중앙선관위 고위직으로 진출했고, 2018년 충북선관위가 경력 채용을 진행하자 충북선관위에 전화를 걸어 충남 보령시청에서 근무하는 딸을 “착하고 성실하다”며 ‘추천’했다. 충북선관위는 아예 송 전 차장 딸 1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비(非)다수인 경쟁 채용’을 진행했다.
서울선관위는 신모 전 서울선관위 상임위원의 아들인 안성시 공무원이 자격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는데도 서울선관위 공무원으로 채용했다. 경남선관위는 당시 총무과장이었던 김모 부이사관(3급)의 딸인 의령군 공무원을 경남선관위 공무원으로 뽑기 위해 면접 점수를 조작했다.
경기선관위도 2022년 산하 과천시선관위에서 사무과장을 지내고 갓 정년퇴직한 A씨의 사위가 경기선관위 채용에 지원한 것을 알고, A씨 사위를 자격이 안 되는데도 뽑아줬다. 중앙선관위 과장 B씨의 조카는 전남선관위에 채용됐는데, B씨는 과거 광주 동구 선관위 사무국장으로 재직하면서 광주·전남 지역 선관위 직원들과 인연이 있었다. 충북선관위, 경북선관위에서도 청주시선관위 국장 자녀, 전 경북선관위 서기관(4급) 자녀를 뽑기 위해 부정이 동원됐다.
이런 고위직 부정 채용 상당수는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지기 전에 이미 내부에서 중앙선관위로 고발 투서가 들어갔다. 그러나 중앙선관위 인사 담당자들은 상관이나 지역 선관위의 지인들이 연루된 이 사건들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덮었다.
감사원은 2023년 6월 선관위 인사 비리에 대한 감사를 시작했고, 자녀 채용 대부분에서 비리 정황을 포착했다. 그러나 사무총장·차장 등 선관위 최고위직들은 “문의 전화를 하기는 했지만 채용 청탁을 하지는 않았다” 등의 말을 하면서 혐의를 부인했고, 직원들도 청탁을 받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상황이 바뀐 것은 감사원이 지난해 4월 중간 발표를 통해 비리 정황을 공개하고 사건을 검찰에 넘긴 뒤였다.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부정 채용에 가담했던 지역 선관위 직원들이 감사원에 고위직들의 부정 청탁과 지시를 구체적으로 진술한 것이다. 감사원 관계자는 “직원들이 자기가 모든 죄를 뒤집어쓸 상황이 되자 선배의 부정행위를 줄줄이 증언했다”고 했다.
김경필 기자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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