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괴테학자 전영애 서울대 교수: 여백지기

 

40년 넘게 전영애 서울대 교수를 사로잡은 괴테의 세 가지 힘

서울대 전체 수석 졸업, 독문학자 길 걸어
<아래 동영상은 꼭 보세요!>



2014년 1월부터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에 여백서원(如白書院)을 세워 혼자 운영·관리하고 있는 전영애(全英愛·72) 서울대 독문과 명예교수. 그는 전 세계가 인정하는 최정상급 ‘괴테 연구자’이다. 1832년 82세로 삶을 마감한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독일어와 독일문학을 당대에 세계문학으로 끌어올린 대문호(大文豪)이면서 정치가·과학자·철학자로도 활동한 근대 위인(偉人)이다.

 



전영애 서울대 독문과 명예교수는 1951년 경북 영주(榮州)시에서 출생해 국민학교 5학년까지 다닌 뒤 6학년부터 서울에 와 혼자 살면서 경기여중·고와 서울대 문리대 독문과를 졸업했다. 그는 동양 여성 최초로 '괴테 금메달'을 받은 세계적인 '괴테 연구 석학(碩學)'이다. 그의 독일어 저서 <괴테의 서·동시집 연구서>는 2018년 바이마르 괴테학회의 77번째 총서로 발간됐다. 전영애 교수는 "모든 건 하늘이 정하겠지만 시간이 허락할 때까지 괴테 관련 연구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송의달 기자

세계가 인정하는 ‘괴테 연구 석학’
2006년부터 2년간 한국괴테학회장을 지낸 전(全) 원장은 2011년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로부터 ‘괴테 금메달’을 수상했다. 1885년 설립된 괴테학회가 1910년부터 2년마다 주는 이 상(賞)은 전 세계 괴테 연구자들에게 노벨상 같은 최고 영예로 꼽힌다. 홀로 괴테 전집(全集) 번역·발간 작업을 벌이는 그는 올해 10월엔 여백서원 뒤편 산기슭에 2층짜리 ‘젊은 괴테의 집’을 완공해 ‘괴테 마을(Goethe-Dorf)’ 조성의 첫 발을 내디뎠다.

경기여중·고를 거쳐 1973년 서울대 독문과 및 문리과대학을 전체 수석 졸업한 전 원장의 학문 여정은 험로(險路)의 연속이었다. 그는 “석사학위를 받고 두 아이를 키우며 10년을 낭패감 속에 보내면서 혼자 책을 끊임없이 읽고 번역했다. 타이핑을 너무 많이 해 저녁에 젓가락질이 안 되는 날도 많았다”고 했다.

11년간 지역 대학 근무 후 1996년 모교에 부임해 2016년 퇴임한 그는 2011년 ‘서울대학교 교육자 상’을 받았다. 20년 동안 그가 한 ‘독일 명작(名作)의 이해’는 최고의 인기를 모은 명강의로 지금도 회자된다. 유가(儒家) 전통이 강한 경북 북부지방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왜 40년 넘게 독일인 괴테에 빠져 있을까? 괴테에게는 어떤 마력(魔力)이 있으며,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인가? 이런 의문을 품고 기자는 이달 14일 낮 여백서원을 찾아 전영애 원장을 만났다.




- 괴테와의 인연은 언제, 어떻게 맺었나?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로 독일문학 공부를 시작해 1986년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은 파울 첼란(Paul Celan·1920~1970년) 연구로 썼다. 1974년 <파우스트>를 처음 읽은 이후 40년 넘게 괴테에 매료돼 있다. 등산인들이 맨 마지막에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것처럼, 독일 문학의 최고봉(最高峰)인 괴테를 내 연구의 종착점으로 삼고 있다.”

‘괴테 전집’... ‘괴테 마을’ 추진
- 혼자서 괴테 전집 발간·번역 작업을 하고 있는데.

“괴테 사후(死後)에 나온 전집 바이마르판은 본문만 143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나는 이 가운데 한국인들에게 꼭 필요하고 의미있는 것들을 선별해 총 24권을 발간할 계획이다. 중국에선 120여명이 전집 발간을 하고 있다. 아마도 혼자 하는 경우는 내가 유일할 것 같다. 지금까지 <파우스트>와 <서·동(西東) 시집> 등 3권을 발간했으니 갈 길이 멀다.”

 


그는 “괴테가 생전에 쓴 편지 원본만 2만여통이고 1만5000통을 독일 학계가 수거해 갖고 있다. 이 중 가치있는 것들을 추려 ‘사랑에게’ ‘친구에게’ ‘세상에게’라는 이름으로 세 권 분량의 번역을 이미 마쳤다. <식물변형론>같은 괴테의 자연과학 저서도 전집으로 낼 것”이라고 했다.

- 서울에서 승용차로 약 두 시간 거리의 한적한 곳에 지내는데 외롭지 않나?

“젊었을 때는 몰랐는데 살아보니 쓸데없는 계산하느라, 남들과 비교하느라 힘과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면 제법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더라. 세상의 정말 중요한 일들은 ‘외로움의 힘’으로 이루어진다. 외로움은 ‘정말 중요한 일’을 이뤄내는 원동력(原動力)이라고 생각한다.”

- 매일 괴테와 ‘영혼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다. 괴테에 30년 넘게 매혹된 이유라면?

“‘문인(文人) 괴테’는 그의 지극히 작은 단면이다. 괴테는 바이마르 공국(公國)의 재상(宰相)이자 4개 부처 장관을 지낸 정치가였고 1400점의 그림을 남긴 화가였다. 뉴턴의 광학(光學)이론에 맞서 색채와 식물을 깊이 연구했고 화재 난 극장을 다시 건축하는 일도 책임졌다. 1749년부터 1832년까지 82년에 걸친 괴테의 삶은 현대인에게 귀하고 값진 영감(靈感)과 감동을 주고 있다.”

①60년동안 <파우스트>...끈기와 지속성
그는 이어서 말했다.

“괴테의 자기형성(自己形成) 자체가 놀랍다. 적지않은 근·현대 철학·예술가들은 어딘가 일그러져 있거나 병들어 있는데, 괴테는 인생을 원만하고 견실하게 살면서 탁월한 작품들을 남겼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단테 등과 달리 괴테는 지금 시대와 훨씬 가깝다. 전문화돼 있으면서도 일그러지지 않은 괴테는 우리에게 전인적(全人的)인 자기형성의 훌륭한 모델이다.”

 



- 어떤 측면이 그런가?

“가장 두드러진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그의 끈기와 지속성이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모든 큰 노력에 끈기를 다하라’로 썼는데 그 자신이 이를 평생 행동으로 옮겼다. 예컨대 괴테는 <파우스트>를 22세부터 82세까지 60년동안 썼다. 3000여년의 시공(時空)을 넘나드는 <파우스트> 2부는 당대에 이해받지 못하리라 생각해 죽기 한 해전인 1831년 여름 봉인해 장롱속에 넣었다. 이듬해 죽음을 눈앞에 둔 정월, 그는 봉인을 풀어 수정한 뒤 다시 봉인했다가 3월22일 타계했다.”

전 원장의 이어지는 말이다.

“괴테는 광학 연구에 40년 동안 매달렸고, 식물 연구도 1786년 이탈리아 여행 무렵부터 시작해 평생에 걸쳐 했다. 인도의 설화를 소재로 한 발라데 한 편을 쓰기 위해 그는 ‘40년을 품고 다녔다’고 했다. 그 한 편의 시(詩)를 ‘다마수쿠스의 검(劍)’처럼 날카롭게 벼린 것이다. 가볍고 표피적인 것들이 넘쳐나는 지금 시대에서는 찾을 수 없는 긴 호흡으로 탄생한 괴테의 작품들은 더욱 독보적인 가치와 빛을 발하고 있다.”

그는 “바이마르 공국(公國)에서 산업부 장관도 맡았던 괴테는 은광(銀鑛)을 살리기 위해 1만8000종의 광물을 수집해 연구했다. 놀라운 정열과 탐구력이다”고 밝혔다.

 



②호기심과 탁월한 시간관리
- 문인이면서 동물학자, 해부학자, 지질학자, 외교관, 신학자 등으로 괴테는 어떻게 이처럼 다방면의 활동을 할 수 있었나?

“괴테는 ‘종이시대에서 가장 생산적인 문인’이었다. 괴테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구술(口述)에 능숙해 다방면의 호기심을 소화할 수 있었다. 더 결정적인 것은 탁월한 시간관리이다. 괴테는 평생 아침 5시30분부터 오후 1시까지 글을 쓰거나 책을 읽었고, 오후 1시부터 사람들과의 식사로 정치를 시작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연극 공연을 주관했다.”

그는 이렇게 이어 말했다.

“괴테는 ‘시간이 나의 재산, 내 경작지는 시간’(Die Zeit ist mein Besitz, mein Acker ist die Zeit)라고 노래했다. 그는 손자 발터에게는 ‘오늘과 내일 사이에는 아직 긴 시간이 있다. 처리하는 법을 빨리 배우라’고 써 줬다.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으면서도 아둥바둥하거나 초조해 하지 않고 여유와 관조(觀照)를 즐긴 괴테는 시간관리의 달인(達人)이었다.”

 

 



③人間愛와 생의 마지막까지 분투
- 많은 문학 작품에서 드러난 괴테 정신의 정수(精髓)는 무엇인가?

“1만2111행의 시(詩)로 짜여진 대장편 희곡인 <파우스트>를 한 줄로 요약한다면,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Es irrt der Mensch, solang er strebt)’이다. 인간이 길을 잃고 방황한다는 것은 갈 곳, 목표, 지향점이 있다는 말이다. 반대로 방황이 멈춰지고 자족과 정체(停滯), 그리고 안주(安住)가 일상화된 삶이라면, 목숨이 붙어 있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분투하라는 뜻인가. 괴테도 그러했나?


“그는 생을 마치기 직전까지 <파우스트>를 수정하고 다듬었다. 바이마르 괴테하우스의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침상(寢牀)에 가면, 벽에 음향학 용어사전과 지질학 용어 사전이 걸려 있는 게 보인다. 괴테는 눈을 감기 직전까지 매일 아침 두 궤도에 적힌 용어를 외웠다고 한다. 비록 그의 침실은 하인 방 보다 좁았지만….”

전 원장은 “괴테가 세상에 남겨놓은 것은 파우스트, 베르테르 같은 허구(虛構)의 인물들만이 아니다. 그는 ‘괴테’라는 인물 자체를 남겼다. 우리는 괴테라는 근대인의 표상(表象)을 통해 자기 삶을 성찰(省察)하며 한량없는 감동(感動)과 감화(感化)를 받는다”고 했다.

- 어떤 측면에서 괴테가 근대인의 표상인가?

“한 번 주어진 자신의 삶 뿐 만 아니라 이웃과 민족을 지극 사랑하면서 문제 해결과 극복을 위해 철저하게 고민하며 대안을 내놓으려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는 정치·행정가로서 ‘위로부터의 개혁’을 하려고 직접 많은 실용적 연구를 했다. <파우스트>에는 ‘세계를 그 가장 내면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는 정신이 관통하고 있다. 괴테 스스로도 ‘일이관지(一以貫之)’ 정신으로 맡은 일을 끝까지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의 모든 행동의 밑바탕에는 ‘사랑이 살린다(Lieben belebt)’라는 인간애(人間愛)가 있다.”



그는 “괴테의 이런 꾸준한 활동의 생애는 지적(知的) 활동은 중단한 채 등산·유튜브 등으로만 대부분 소일(消日)하는 한국의 60~80대 노년층에게 울림을 준다”고 했다.

“인간의 가장 양질의 부분은 전율”
- 삶과 일에 철저한 괴테를 보노라면, 독일인의 치열한 직업정신(職業精神)이 떠오른다.

“동감한다. 괴테는 자기 분야에 누구보다 철저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어느 날 저녁 누구를 어느 식당에서 불러 얼마치 음식을 대접하고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를 상세하게 기록했다. 괴테의 이런 자세는 독일인의 전통으로 내면화되고 있다. 독일어로 직업은 ‘Beruf’인데, 여기서 파생된 ‘Berufung’은 소명(召命)의식을 뜻한다. 직업 수행을 자신이 태어날 때 부여받은 ‘소명의 실천’으로 여기는 인식이 견고하다.”

- 괴테가 남긴 문장(文章)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표현을 꼽는다면?

“<파우스트>에 나오는 ‘인간의 가장 양질(良質)의 부분은 전율(戰慄)이다’는 문장이다. 나이가 80~90세가 되더라도 열려 있는 사고(思考)와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 활력, 정열, 호기심의 중요성을 갈파한 말이다. 괴테 본인은 이렇게 살았다. 감성과 여유를 잃어버린 한국의 성인들도 되돌아봐야 한다.”









5년간 독일 서적 4권 등 모두 9권 써
- 독일을 제외하면 전 세계에서 유일한 ‘괴테 마을’을 짓고 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가.

“괴테는 ‘사람이 뜻[志]을 가지면 얼마나 클 수 있는가’ ‘그런 큰 사람은 어떻게 자기를 키우고 형성했나’를 보여주는 생생하고 위대한 전범(典範)이다. 괴테의 정신과 노력, 자세를 한국인들이 또렷하게 배우고 공유해서 괴테와 같은 큰 인물들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괴테로 말미암아 그가 살았던 인구 6만명의 소도시 바이마르는 세계가 주목하는 문화 수도가 됐다. ‘괴테 마을’이 들어선다면 여주도 세계적인 명품 인문 도시가 될 수 있다.”

- 지금까지 인생에서 하이라이트를 꼽는다면?

“2008년부터 2013년까지 5년간 독일 프라이부르크 고등연구원 수석연구원을 겸할 때이다. 방학 때에만 독일에 가서 원없이, 한없이 공부했다. 15m쯤 떨어진 침실로 건너가지 못하고 밤새 공부한 날들이 많았다. 그래서 새벽 3시에 출근하는 청소부 아줌마랑 제일 친해졌다. 그 5년 동안 독일어 저서 4권과 필생의 저술이라고 할만한 한국어 저서·역서(譯書) 5권 등 모두 9권을 냈다.”




“배움에 간절했던 어머니 몫까지”
- 평생 쉼없이 공부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공부를 하는가?

“내 자신에 항상 부족함을 느껴 더 나은 삶,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다. 그런 마음에 젊었을 때부터 더 배우고 더 공부하고 싶었다. 너무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생후 두 달 된 아기를 놔두고 독일로 유학가 3개 학기동안 공부만 하고 돌아온 적도 있다. 학교 문턱에도 못 갔지만 12살부터 책만 보면 한지(韓紙)에 필사(筆寫)하며 평생 배움에 간절했던 어머니 몫까지 산다는 생각도 해왔다.”

전 원장은 “지금까지 여권 4개가 입출국 도장으로 가득찼는데 놀러 나간 적은 한 번도 없다. 어머니는 글이 적힌 것은 어떤 종이도 밟거나 타 넘지 않았다. 그만큼 글과 배움을 중시했다”며 이렇게 밝혔다.

“1남1녀 두 아이를 키우면서 엎드려 읽고 애 업고 읽고, 빌려다 읽고, 복사해서 읽었다. 무조건 읽으며 최선을 다해 구불구불 길을 걸었는데 눈은 캄캄했다. 매양 걸었는데 어느 순간 안 보이던 길이 보이기 시작했고 지도(地圖)가 그려진 듯했다. 그리고 사람들한테 도움될 수 있고 내가 받은 은혜를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하루하루가 참 귀하고 소중하다.”

-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젊은이들에게 조언한다면?

“인생을 너무 계산적으로 살 필요는 없다고 본다. 비록 도중에 이 길이 맞는지 알 수 없다 할지라도 자신의 일을 성심성의(誠心誠意)껏 하면 그 안에서 길이 반드시 생긴다. ‘본업에 충실하면서 반듯하게 사는 게 손해보는 일만은 아니다’는 말을 꼭 해주고 싶다.”



교양있는 시민들이 독일의 버팀목
- 독일에는 ‘교양시민층’이라는 문화 애호가들이 많지 않나?

“실제로 그렇다. 올해 12월 초 독일을 찾았는데 73세의 전(前) 바이마르 도서관 관장이 폭설로 기차가 끊어지는 와중에도 바이에른 시골 마을을 가려고 해 이유를 물었더니 ‘94세의 역사학자와 인터뷰를 해 책을 만드는 중’이라고 답하더라. 괴테실러 아카이브 전(前) 관장은 최근 800페이지짜리 책을 탈고했다. 그의 책은 200년간 대형 사전을 만든 브록 하우스(Brock Haus)라는 가문(家門)을 다루었다. 지금 시대에도 깊이있고 두터운 책을 꾸준히 내는 지식인들이 독일 사회의 버팀목이 되고 있는 게 부럽다.”

-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문학(文學)의 효용은 무엇인가?

“우리는 내 인생 하나 겨우 산다. 그런데 문학 작품을 읽으면 다른 삶들을 경험하고, 나와 다른 사람들 곁에 가볼 수 있다. 이게 엄청난 경험이다.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을 더 잘 이해하고 감동받는다. 또 어떤 예상치 못한 일에 충격과 조종당하는 사태를 크게 줄일 수 있다. 범람하는 소셜미디어(SNS) 등으로 조종·쏠림·왜곡이 일상화된 시대에 문학과 인문학의 가치는 과거 보다 훨씬 더 높다. 지금이 제대로 인문학을 할 때다.”

그는 “과일로 비유하자면 굳이 숱한 이야기를 통해 시고 단 과육을 먹는 게 문학작품이다. 온갖 명품을 사려고 애쓰는데 이왕이면 정신적인 명품도 가까이 하면 좋지 않겠나”고 말했다.

전영애 원장이 40년 넘게 읽은 독일어판 <파우스트>. 너무 낡고 헤어져서 붉은 끈으로 묶어 놓았다.





“단칸방에서 책 읽고 글 쓸 때 가장 행복”
- 65세 퇴임 후에 더 바쁘고 건강해 보인다. 은퇴했거나 은퇴를 앞둔 이들에게 조언한다면?

“작은 일이라도 내가 안 하면 표 나는 일을 최소한 한 개 이상씩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집안, 동네, 사회, 어디에서든 좋다. 직장 다닐 때 같은 직위나 돈을 바라지 않고 꾸준히 하다보면 가정, 사회, 세상에서 내 자리가 만들어진다. 여백서원에 와서 봉사하는 은퇴자 분들은 아주 작은 일을 해도 어마어마하게 성장하더라.”

-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은 언제인가?

“서원에서 해야 하는 일들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늦은 밤, 작은 등불을 들고 캄캄한 후원(後園)을 걸어 가 한 평도 안 되는 작은 단칸방의 불을 켤 때이다.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땀 흘려 노동하고, 읽고, 쓰는 게 아마도 마지막 날까지 저의 모습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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