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공지] 나에게도 온 희망퇴직: D-5..."끝. 이. 다. "

 

  전혀 몰랐다. 금융회사에 다닌다면서 경제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2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해오면서 조직의 불안함을 감지하지 못한 둔한 나였다. 이런 나에게 찾아온 공지메일이었다. 

 

내 기억 속 경제불황은 먼 옛날로 생각되는 IMF 시절부터 시작하여 지속적으로 찾아왔었다. 그리고 딱히 짚어볼 만한 호황기는 없이 불황으로만 이어지던 보험권. 최근에도 인사적체 및 세대교체를 필두로 이어진 보험권에서의 희망퇴직. 그런데, 우리 회사에서의 희망퇴직이 지금은 아니라고 어찌 자신하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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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직기간을 기준으로 우리 부서 10명 중 5명이 대상자. 좀 더 작게 보면 우리 팀 5명 중 4명. 남들이 보기에 고인 물이 많았지만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는 이 시점에 회사를 그만둘 이유는 없었다. 수년의 연봉을 위로금으로 준다고 하더라도, 현재 회사 사정상 향후 본사 가이드상 그 이상의 위로금은 없을 거라는 설명에도, 그다지 매력적인 조건은 아니었다. 몇 년 동안 회사를 더 다니면서 은퇴준비를 해야겠다는 의지를 다질 뿐이었다.

 

 

(D-4)

우리 팀 W이 아침부터 면담 요청을 했다. 출근하자마나 희망퇴직 신청서를 제출했다고 했다. 이미 내년에 회사를 그만둘 마음이 있었다 하니, 이번이 너무 좋은 기회였다. 진심으로 응원했다. 동갑으로서, 회사가 아닌 곳에서 친구로서 만나자고 유쾌하게 대화했다. 이제 W의 담당 업무는 내가 맡아야 하는구나...... 난 그만두지 않을 결심으로 굳혀야 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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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퇴근 후 집으로 걸어가는 길 매일의 일상적인 공간과 시간에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P의 전화였다.

 

“인사팀 면담했어요?”

“아뇨, 인사팀이 왜요?”

 

나 너무 해맑았다. P의 걱정스러운 말투는 느끼지 못한 채.

 

회사가 많이 어려우니 나가 달라, 이번에 신청을 안 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거다, 신청을 안 한다고 해서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없을 거다, 회사도 결정을 해야 한다...... 고 했다 한다.

 

P는 그동안 여러 직장을 다니며 희망퇴직을 하는 동료들을 많이 봐왔지만, 결국은 버티는 게 이기는 거라 생각하여 공지 몇 시간 만에 신청하지 않을 거라 다짐하셨다 했다. 그런데 인사팀 면담 이후 마음이 흔들렸고, 가족들에게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고민이 되어 귀가하지 못하고 동네를 배회 중이셨다.

 

 

 

P의 방황은 나에게도 혼란을 주었다. 희망퇴직이 퇴직을 희망하는 직원들을 독려하는 게 아니었다. 나, 참 순진했었던 거다.

 

(D-3)

올해 초에 새로 맡은 일이 너무 힘들어서 진심으로 그만두고 싶었지만, 마음 잡고 일하기로 결심했으므로 희망퇴직 공지에 흔들리지 않고 우리 회사에 뼈를 묻겠다고 얘기했던 K의 연락이 왔다. 회사가 필요 없다고 하니 그만두기로 했다고. 내년에는 위로금도 없이 해고될 수도 있다고 한다, 일을 잘하든 못하든 오랜 기간 회사에 애정을 가지고 열심히 했던 사람으로서 회사가 사람을 위해주는 건지, 협박하는 건지 가늠이 안된다고 했다. 내가 아는 K는 그 누구보다도 긍정적이고, 회사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했기에, 그의 결정과 과정이 너무 마음 아팠다.

 

(D-2)

이제 나도 진짜 결정해야 했다. 결국 부서장에게 연락을 했다. 늦은 밤 시간에 긴 전화통화를 하며 진심을 담아 아는 바를 말씀해 주셨다. 나는 그를 믿는다. 항상 직원이라기보다 사람으로 먼저 대해주는 분이다. 직접적으로 이게 좋다 저게 좋다 말씀하지는 못하지만, 내 마음은 어느 정도 기울어졌다.

 

(D-1)

동료들과 메신저로, 전화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눈물이 났다. 울컥울컥 했다. 재택근무 중이니 다행이지 싶었다. 자꾸 가슴속에서 울분이 치밀어 오르고, 걱정이 눈앞을 가리며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신청을 하자, 기다리자...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데 인사팀에서 전화가 왔다.

 

"희망퇴직 공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생각이 중요할까요?"

"회사가 많이 어렵습니다. 나가주시면 좋겠습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게 다다. 그리고 나는 결정했다. 신청서를 내기로.

 

퇴근시간이 넘어 부서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미안하다고 하시는데, 그가 미안할 일은 아니었다. 그건 안다.

울었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이렇게 회사를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는데,

난 이 회사를 싫어한 적이 없었는데,

 

더 잘되기 위한 방향만 보고 쉼 없이 달려왔는데,

며칠 전만 해도 연말 계획, 내년 계획에 고민 중이었는데,

 

낼모레로 다가오는 이번 달 부서회의를 준비하며, 다음 달 부서회의를 기획하고 있었는데,

 

모두 다 부질없었던 거다. 회사를 그만둔다고 단 5일 만에 결정하는 게 가능했던 거다. 참 쉬운 일이었구나. 왜 몇 년을 준비하려고 했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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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ay)

신청 마감일이다. 어제 마음의 결정했으니, 신청서를 작성하고 메일의 보내기 버튼을 누르는 일만 남은 상태, 허무했다. 이렇게 퇴사 과정이 단순할지 몰랐다.

 

오후 4시, 보냈다.

오후 4시 30분, 희망퇴직을 수락하고 퇴사절차를 진행하겠다는 회신이 왔다.

 

 

끝. 이. 다.

 

출근은 알아서 하면 되고, 이번 달 급여는 나올 거고, 미소진 휴가도 유급처리 해준단다. 누구 하나 그만둘 때 인수인계를 제대로 했니 안 했니, 규정상 정해진 날짜를 채워야 하느니 까다롭게 굴던 회사가 희망퇴직에는 후하다.

 

남아 있는 서류들을 보니 신청서는 내가 냈고, 승인은 회사가 했다. 그렇지만 일련의 과정을 겪고 보니, 직원의 희망퇴직이 아니라 회사의 희망퇴직이었던 걸로 마무리되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공지문 제목에 행위의 주체 ‘주어’가 없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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