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한 도발을 바로잡는 건 도발이 아니다"
‘赤化 없는 독립은 없다’는 빨치산이 서훈되고
서훈을 근거로 유해가 현충원에 안장되고
국방부와 육사에까지 흉상이 만들어지고
국민의 포괄적 추념의 대상이 되는 역사 도발
계봉우는 이동휘와 함께 볼셰비키 노선을 따르는 한인사회당을 창당하고 활동하다가 소련에 정착했다.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로 강제이주 당한 후에는 그곳에서 한국어 학자와 한국 역사가로 행세했다. 그는 1952년 펴낸 ‘조선역사’에서 6·25전쟁을 “미 제국주의가 일으킨 침략 전쟁”으로 규정하면서 “미구(美寇)가 남선(南鮮)으로 붙어 북선(北鮮)까지 강점하기 위해 고금에 유례없는 비행(非行)을 범하고 있다”고 썼다.
계봉우의 유해가 문재인 정부 때 대통령 전용기로 옮겨져 국립현충원에 묻혔다. 김영삼 정부 때 독립운동 경력이 있는 공산주의자에게 대거 건국훈장을 줄 때 그도 독립장을 받았다. 서훈은 그저 서훈으로 끝나지 않았다. 서훈이 근거가 돼 현충원 안장으로 이어졌다.
크질오르다는 홍범도도 살다 죽은 곳이다. 홍범도 집 근처에는 계봉우 최계립 이인섭 등 왕년의 빨치산이 이웃하며 살았다. 그들이 다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물론 소련에 살다 보니 6·25전쟁을 미제의 침략 전쟁이라고 여겼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변명은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에 먹고살기 위해 연해주로 건너갔다가 졸지에 공산 혁명을 당해 소련 치하에 살게 된 사람들이나 할 수 있다. 왕년의 빨치산들은 ‘적화(赤化) 없는 독립’은 가능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고 여기고 소련을 택한 사람들이다. 최소한 그들은 그런 변명을 늘어놓을 자격이 없다.
물론 홍범도는 6·25전쟁 발발 전인 1943년 죽었다. 그러나 홍범도는 1939년 소련이 독일과 싸우게 되자 자신을 전선에 보내달라며 행정기관까지 찾아가 호소한 사람이다. 그가 죽었을 때 고려인 신문 ‘레닌기치’는 부고 기사에서 그를 소련 공산당의 충직한 당원이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가 살아서 6·25를 맞았다면 어떠했을까. 그런 사람의 흉상을 육사에 설치해놓고 생도들이 경례를 하고 다닌다.
독립군은 일본군에 쫓겨 러시아령 이만으로 들어갔다가 일부는 간도로 다시 돌아가고 일부는 자유시로 향했을 때부터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로 확연히 갈라졌다. 홍범도는 1919년부터 빨치산이 됐다고 나중에 밝혔지만 공산주의자였음이 외부로 분명히 드러난 건 1921년 자유시로 향할 때부터였다. 다만 그가 그저 한인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일부 한인 공산주의자에게만 주어진 소련 공산당원 자격을 부여받는 등의 자유시 사변 이후 행적은 소련 붕괴 후 소련 문서를 볼 수 있게 될 때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홍범도에게는 윤보선이 대통령이고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주어졌다. 자유시로 향하기 전 돌아선 이범석조차 1971년 펴낸 회고록 ‘우등불’에서 “홍범도가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원의 권유로 공산주의자가 됐지만 그 속에서 할 일도 없고 이름만 빌려준 셈이 돼 그 후 자유시 부근에서 방황하다가 병들어 불쌍하게 사망하고 말았다”고 쓸 정도로 잘못 알고 있던 시절 주어진 훈장이다.
홍범도는 자유시 사변 직후 간도 독립군을 갖다 바치는 데 앞장 선 공로로 레닌에게 포상까지 받는 등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냈다. 왕년의 한인 빨치산 중 상당수가 스탈린 치하에서 수감생활까지 하며 치른 교화 과정도 홍범도는 치르지 않았다. 민족을 사지로 내몬 강제이주에 대해 한마디 불평의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홍범도는 ‘방황하다가 병들어 불쌍하게 사망한 것’이 아니라 소련 공산당의 충직한 당원으로서 연금과 복지 특혜에 극장 수위까지 하면서 ‘넉넉히 살다가’(반병률 한국외대 명예교수 표현) 당시로서는 장수인 75세에 사망했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육사에 홍범도 흉상을 설치하고 2021년 홍범도의 유해를 가져오면서 그의 건국훈장도 대통령장에서 대한민국장으로 올렸다. 육사에 흉상 따위를 설치하지 않고 훈장 등급을 그대로 뒀다면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주제넘게 역사의 재조산하(再造山下)를 한다며 침묵의 균형을 깨고 먼저 도발을 감행한 것은 문 대통령이다.
홍범도의 유해를 가져올 때 공군기 6대가 호위하고 대통령이 늦은 밤 공항에서 직접 맞는 장면을 보면서 참으로 괴이한 기분이 들었다. 홍범도 흉상을 설치할 당시 딸의 친구인 육사 여생도로부터 전해들은 생도들의 ‘말 못 하는 분노’를 잊을 수 없다. 먼저 한 도발을 바로잡는 건 도발이 아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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