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 시장의 세 가지 바람] ‘조용한 해고’ ‘조용한 고용’
지난 10여 년간 다보스 포럼의 단골 메뉴는 ‘고용 없는 성장’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인력과 고용’이 6대 의제 중 하나로 올랐다. 그만큼 선진국 노동 시장이 격변의 시대를 맞았음을 의미한다.
저출산고령화 속에 베이비부머 세대가 앞다퉈 은퇴하면서 2021년 노동 공급이 부족한 대사직(大辭職·Great Resignation)의 시대가 열렸다. 2022년에는 MZ세대의 콰이어트 퀴팅(Quiet Quitting·조용한 퇴사)이 세계적으로 화제였다. 콰이어트 퀴팅은 실제로 사표를 쓰는 게 아니라 직장 내에서 정해진 시간과 업무 범위 내에서 할 일만 최소한으로 하려는 풍조를 말한다. 여기에는 워라밸을 추구하거나 본업 외에 부업을 두는 N잡러 세태도 포함된다. 작년 배달의 민족, 쿠팡이츠가 배달 라이더를 잡기 위해 정규직 카드를 꺼냈을 때 반응이 시큰둥했던 데도 이런 풍조가 반영돼 있다. 이런 경향이 생산성 악화를 야기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지만, 영국의 경영학자 앤서니 클로츠는 콰이어트 퀴팅을 일로 인한 번아웃을 막고 삶의 질을 중시하는 현상으로 해석한다.
경기 하강 속에서도 한국과 미국 노동시장은 아직은 탄탄한 편이다. 하지만 작년 상반기부터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제조업관리지수는 하락 일로다. 경기 둔화와 고용 악화 사이의 시차를 감안하면 제조업 부문에서 고용 감소가 조만간 나타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건설 경기도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수준으로 나빠져 건설 부문의 가파른 고용 감소 가능성도 커졌다. 기업 최고경영자들은 올해 경제 위기 대처 방안으로 인력 감축을 내세우고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올해 일자리 시장의 키워드는 다음 세 가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우선, 빅테크 기업을 중심으로 한 ‘시끌벅적한 해고’(Loud Layoff)이다. 메타, 트위터, 세일즈포스, 리프트, 도어대시, 크라켄이 감원 ‘칼바람’의 주역이다. 최근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는 비용 절감을 위해 올해 각각 1만8000 명, 1만명을 추가 해고하겠다고 밝혔다. 우리나라도 금융권을 중심으로 대규모 희망퇴직이 진행 중이다.
‘조용한 해고’(Quiet Firing)도 유행할 전망이다. 회사 관리자가 직원에게 커리어 발전 기회를 제공하지 않거나, 핵심 업무를 다른 직원에게 맡기거나, 비합리적인 성과 목표를 제시해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나가게 만드는 방법이다. 해고가 힘들도록 노동 시장이 경직되고 정부가 감시의 눈을 부릅뜰수록 조용한 해고의 욕구는 더 높아진다. 해고 대신 채용 동결로 자연적인 인력 구조조정에 나설 수도 있다.
‘조용한 고용’(Quiet Hiring)도 눈여겨봐야 한다. 기업이 신규 풀타임 직원을 채용하지 않고 기존 근로자의 역할 전환으로 필요 업무를 수행하는 방식이다. 정규직 대신 단기 계약 직원을 뽑아 일을 시킬 수도 있다. CNBC는 올해 조용한 고용이 미국 내 주류로 부상할 거라 보도했다.
하지만 이런 세 가지 방식으로 당장의 위기에 대응하면서도 기업은 젊은 핵심 인재를 유치하고 회사에 어떻게 남아 있게 할까를 고민해야 한다. 요즘엔 입사 후 1년도 안 되어 일을 그만두는 빠른 사직이 늘고 있다. 성장의 환경을 갖췄나, 롤 모델 선배가 있나, 몰입할 가치 있는 일인가라는 질문에 기업이 답해야 한다. 채용은 기업의 핵심 자산인 인적 자본을 확보하는 일이다. 재무제표 변화처럼 일희일비해서는 혁신 역량을 상실할 수 있다. 불황일수록 핵심 사업 집중, 혁신 걸림돌 제거, 신사업 투자 관점에서 인력을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 불황은 짧고 인재는 영원하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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