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물의 유전자 보호는 인류의 의무다 [신현덕]
작물의 유전자 보호는 인류의 의무다
2022.06.07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이 유럽을 넘어 세계의 식량 수급 질서를 뒤흔듭니다. 북반구에 위치한 우크라이나는 현재 농업 생산이 마비된 상태입니다. 이에 따라 식량 공급 체계 와해와 식량 유전자의 파괴가 두렵지만 현실로 드러났습니다.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종자 저장 시설 포격에 전 세계가 경악했습니다. 이곳은 전쟁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인류미래를 위한 자원 보관소일 뿐입니다. 러시아는 전쟁이 의도대로 진척되지 않자 세계를 겁박할 요량으로 종자 보관소 폭격이란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종자 저장 시설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규모이며, 세계 열 번째인 하르키우 국립식물유전은행은 15만여 점을 보관 중입니다. 보관된 대부분이 종자이지만 실제로 필요한 것은 식량자원의 유전자입니다.
1945년 무렵 값싼 농약이 공급되기 시작하면서 농민은 증산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소득증대가 지상 최대의 목표였습니다. 농민은 생산량이 떨어지는 작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농장에서 아예 그 씨앗을 없애버렸습니다. 그 결과 재배에서 제외된 품종은 곧장 멸종으로 치닫곤 했습니다. 이때부터 작물의 유전자 보존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했고, 21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보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스웨덴에 건설된 종자 보관소(Global Seed Vault)입니다.
필자도 토종 씨앗을 보존하는 사업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토종은 씨앗의 원산지는 아니지만 같은 장소에서 여러 대를 이어 재배되는 동안 작물의 생리가 여러 가지로 변한 것입니다. 우리 땅에 잘 적응해 비교적 재배가 쉽지만 생산량은 많지 않습니다. 새로운 품종으로 분류하기에는 여러 조건에서 미흡하지만 재배지역이 서로 달라지면서 서로 다른 결과를 나타내는, 육종학에서 이야기하는 아종인 셈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우리 토종임이 쉽게 드러날 수 있는 쥐이빨 옥수수, 쥐눈이콩, 담배상추, 쇠뿔가지 등 10여 종의 씨앗을 300평쯤 되는 밭에 뿌렸습니다. 생산량이 읍·면사무소에서 분배하는 육성종과 5~6배 차이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종을 선택하여 기르는 사람들이 아주 조금씩 늘고 있습니다. 유전자를 보호해야만 한다는 소박한 생각 때문입니다.
지구상에는 약 50만 종의 식물자원이 있습니다. 인간이 자원으로 이용하는 것은 고작 3,000여 종이며, 경작되는 것은 30~100종에 불과합니다. 보호 중인 작물이 훨씬 많은 것은 이다음 각 작물이 가진 유전자가 중요한 육종의 원재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호해야 할 이유입니다.
곡창으로 알려진 우크라이나의 농지와 운반, 저장, 육종 시설 등이 대규모로 파괴되었습니다. 농민들은 농사를 접었고, 전쟁에 동원되었거나 피란길에 올랐습니다. 이번 봄에 파종하려 준비한 씨앗은 소용이 없어졌고, 전장이 된 농토엔 파종조차 할 수 없습니다. 절반에 가까운 농토에 작물을 심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올가을 수확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새 품종 생산을 위한 육종은 생각조차 할 수는 상황입니다.
우크라이나의 식량 수출이 중단되자 당장 세계 각국이 식량 확보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앞으로 다가올 부족한 문제를 염려하기 시작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식량에 여력이 있던 많은 국가조차도 자국의 식량수급 안정을 위해 수출을 감소하거나, 아예 전면 중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말레이시아가 닭고기 수출을 중단하자 이웃 싱가포르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즐겨 먹던 ‘치킨 라이스’를 식탁에 올리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싱가포르뿐만 아니라 당장 이웃나라 일본과 홍콩 등도 닭고기 부족을 심각하게 받아들입니다. 터키의 양고기 수출 중단은 양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중동이나 기타 국가들에게 치명적인 일입니다. 인도의 밀과 설탕 수출 중단은 어떤가요. 나비효과처럼 남미와 아프리카 등에선 굶주림이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최근엔 쌀 수출국들도 쌀값을 올려야만 한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피해가 쓰나미처럼 몰려옵니다. 소비자 물가 인상이 5%를 넘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팜유 등이 세계 시장으로 나오지 않자 마트에서 판매량을 한정했거나, 일부 튀김식당에선 암암리에 비축량을 늘리고 있습니다. 즐겨먹던 라면 값도 인상 압박을 받습니다. 어느 닭고기 사업자는 튀김 한 마리 2만 원은 되어야 한다고 해 비난을 받았습니다만 요식업계에선 지지하는 이들이 더 많습니다. 식량자급도가 매우 낮은 우리나라가 감당할 비용은 어쩌면 석유수입액을 뛰어넘을런지도 모릅니다. 세계의 식량 생산 및 공급업무 마비가 조만간 제자리로 돌아올 가망은 없습니다. 미래는 더욱 암담합니다. 천정부지로 오르는 석유 값이 식량문제와 겹쳐지면 위기가 어디로 확산될지 예측이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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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신현덕
서울대학교, 서독 Georg-August-Universitaet,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 몽골 국립아카데미에서 수업. 몽골에서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 방어. 국민일보 국제문제대기자, 한국산업기술대학교 교수, 경인방송 사장 역임. 현재는 국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서독은 독일보다 더 크다, 아내를 빌려 주는 나라, 몽골 풍속기, 몽골, 가장 간편한 글쓰기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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