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배 도전기 (1) [박상도]
도배 도전기 (1)
2022.05.13
발단은 새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면서 시작됐습니다. 전에 쓰던 에스프레소 머신은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겁니다.”라는 쇼핑호스트의 말에 혹해서 구입한 10만 원 초반대의 저렴한 보급형 제품이었습니다. “기계는 사람의 손을 능가할 수 없어!”라고 말하며 보급형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스타벅스 커피를 능가하는 고품질의 커피를 내려주던 딸내미가 코로나 팬데믹이 주춤하면서 다시 유학을 떠났습니다. 주인 잃은 낡은 에스프레소 머신을 보며, 헛헛한 마음에 “에스프레소 머신이나 바꿔볼까?”라는 생각을 하던 차에, 마침 인터넷 라이브 방송에서 고급 에스프레소 머신을 시중가보다 싸게 팔길래 야심 차게 질렀습니다. 그러고 보니 방송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뭔가 빠져들어서 보다 보면 어느새 휴대폰에 저장된 앱카드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벌 때는 그렇게 더딘 돈이 쓸 때는 참 술술 잘 나갑니다.
크롬 도금이 된 에스프레소 머신과 원두 분쇄기가 배달되고 이것들을 어디에 놓을까? 고민하던 차에 도배한 지 10년 넘은 꼬질꼬질한 벽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전세를 줬던 집에 3년 만에 다시 들어오면서 여기저기 흠집이 많이 나서 도배를 한 지 벌써 10년이 지났습니다. 가장 저렴한 합지로 도배를 했는데 합지는 비닐이 코팅된 실크벽지와는 다르게 얼룩이 지면 닦아낼 수가 없어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뱁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아내가 “우리가 계속 살고 있으니까 체감하지 못해서 그렇지 사실 때가 탄 곳이 많아. 자기는 출근을 하니까 잘 모를 수도 있지만, 나는 하루 종일 집에 있는데 좀 심하긴 해.” 라며 새로 도배를 하자고 압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도배? 나도 하고 싶은데, 이 가구들은 어떻게 하고 도배를 해? 도배하는 분들이 우리집에 도배하러 왔다가 아마 기절하실 것 같은데? 사실 도배는 이사하기 전, 빈집에서 해야 작업 속도도 빠르고 품질도 좋게 나오는데, 이미 살림을 산 지 10년 넘은 집에서 가구와 집기들을 옮겨가며 도배를 하는 게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닐 거야.” 라고 얘기하니 “우리가 하자.”라며 아내가 응수합니다. “도배가 쉬워 보여? 벽지 재단은 정말 어렵다. 그리고 풀 바르는 것도 만만치 않아. 빈틈없이 다 발라야 하는데, 그거 어렵다.”라고 대학 시절 친구 자취방 도배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얘기하자, “풀 바른 벽지 파는 거 몰라?”라며 필자를 원시인 취급을 합니다. “요즘 세상에 누가 집에서 풀칠을 하고 도배를 해? 도배하는 분들도 공장에서 풀 바른 도배지 가져와서 붙인 대.” 라고 면박을 줍니다.
그렇게 해서 불안 반 오기 반으로 도배를 하게 됐습니다. 가격도 싸고 도배도 쉬운 합지로 도배하기로 정하고, 우선 집에 포인트를 줄 녹색 벽지를 소량 주문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벽지 고르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필자 눈에는 다 같은 녹색인데 미대를 나온 아내의 눈에는 다 다른 색으로 보이는지 수십 가지의 녹색 벽지 화면을 몇 번을 확대해서 보고 벽에 노트북 화면을 가져다 대보면서 필자의 의견을 물어봅니다. 이때 차이를 모른다고 하면 또 무시를 당할 게 뻔해서 나름 머리를 굴립니다.
“이 녹색은 어때?” 아내가 건조하게 물어봅니다. “글쎄?”라고 답하면서 아내의 눈치를 살핍니다. 그러자 아내의 표정이 밝아지면서 “그렇지? 이건 약간 톤이 어둡지? 그럼 이건 어때?”하고 또 물어봅니다. 필자 눈에는 정권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인사청문회에 등장하는 한결같은 후보들만큼 색깔의 차이를 못 느끼지만, 아내의 억양에서 힌트를 얻어서 대답을 합니다. “아까 꺼 보다는 좋은 것 같아.” 그러자 아내가 “흠… 그렇지? 이게 색깔 자체는 좋은데 우리집 가구랑은 잘 어울리는 것 같지가 않아서 고민이네? 그리고 우리집 몰딩이 연한 색이라서…..”라며 아내는 장고에 빠집니다. 이쯤되면 필자는 배우지도 않은 6차 함수를 풀어야 하는 지경에 놓이게 됩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험난했던 도배 작업보다 더 힘들었던 도배지 고르기였던 것 같습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도배지를 주문하고 택배를 받아 포장을 뜯었는데 아내가 아연실색을 합니다. 모니터에서 본 색상과 너무나 동떨어진 연한 녹색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필자의 눈에도 차이가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이왕 주문한 거니 도배를 시작하려고 벽에 도배지를 붙이려고 사다리를 올라가는데 아내가 “지금 그걸 붙이려고? 하지 마, 하지 마!”라며 다급히 얘기를 합니다. “아까운데 어떡해. 붙여 봐야지…” 하고 한 장을 대충 붙였는데 붙이고 나서야 아내가 왜 그렇게 기함을 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벽에 한 장을 붙여 놓고 보니, 70년대 초등학교 복도에 칠해진 녹색 벽과 정확히 일치하는 색이었습니다. 아무리 레트로가 대세이지만 벽지 색이 온 집안에 동동 떠서 벽과 마루와 천장이 따로국밥이 되어버리는 상황이 됐습니다. 벽지 한 장으로 온 집안이 이렇게 촌스러워질 수도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업체에 전화해서 모니터에 나오는 색상과 실제 색상이 너무 다르다고 하소연을 했으나 오배송이 아니 경우 반품은 없다는 얘기에 눈물을 머금고 폐기처분을 했습니다. 하긴 풀 바른 벽지를 반품한다는 것이 상식에 맞지 않는 일이죠. 그런데, 모니터에 나오는 수많은 녹색 도배지들을 이리 보고 저리 보며 고민에고민을 한 아내는 도대체 왜 그 고생을 한 건지 허탈한 웃음만 나왔습니다.
‘도배지 색상은 눈으로 보는 것만 믿어야 한다’는 교훈을 돈을 주고 배운 후, 아내와 필자는 직접 도배지를 보러 다녔습니다. 요즘은 대기업 인테리어 업체들이 쇼룸을 잘 차려 놔서, 편하게 여러 종류의 도배지 샘플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의 또 다른 장점은 비교가 쉽다는 것입니다. 이 장점이 필자에겐 비극이었습니다. 합지를 보러 갔는데 실크지에 눈이 가고 같은 실크지인데도 고급 실크지에 더 눈이 가고 결국에는 최신 상품인 페브릭 실크지에 마음이 꽂혀서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가 않았습니다. 결국은 아반테 사러 갔다가 소나타를 산 꼴이 된 겁니다.
애초에 합지도배를 하려는 이유는 초보자가 쉽게 도전할 수 있다는 말에 용기를 내서 시작한 것인데 비싼 실크벽지를 선택하고 나니 ‘제대로 이어 붙일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밀려왔습니다. 합지벽지는 겹쳐서 도배가 가능하지만 실크벽지는 벽지의 특성상 겹쳐서 도배를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표면이 코팅이 되어있어 겹쳐서 도배를 할 경우 풀이 마르면서 겹친 부분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크벽지로 도배를 할 때는 이음새에 신경을 써야 하는데 초보자가 하기에는 난이도가 높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시공을 하기 위해서는 초배 작업을 해야 하는데 이게 벽지 바르는 것보다 난이도가 더 높다고 합니다. 덜컥 최고급 실크 벽지를 주문해 놓고 뒤늦게 도배 관련 유튜브를 검색하면서 ‘이제 제대로 큰일이 났구나!’ 생각하면서 걱정이 밀려왔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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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박상도
SBS 선임 아나운서. 보성고ㆍ 연세대 사회학과 졸. 미 샌프란시스코 주립대 BECA 석사
현재 SBS아나운서
ⓒ 2006 자유칼럼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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