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치를 잊은 나라 [방석순]

 

 


염치를 잊은 나라
2022.02.15

체면을 차릴 줄 알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염치(廉恥)라고 하지요. 가난은 때로 그런 염치를 잊게 합니다. 동족끼리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던 시절 사람들은 미군 부대서 쏟아져 나오는 쓰레기더미를 헤치며 먹을 것을 찾았습니다. 먹다 버린 음식 찌꺼기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꿀꿀이죽’이라는 말도 그때 생겨났습니다. ‘부대찌개’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메뉴가 되었습니다.

부자 나라 미국의 수도 워싱턴이 지금 돈을 내지 않고 몰래 메트로 버스에 올라타는 무임승차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신문은 “당신이 메트로 버스에 올랐을 때 좌우 옆자리에 앉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요금을 내지 않은 사람”이라고 실감 나는 기사를 실었더군요. 워싱턴의 메트로 버스는 전부터 무임 승객으로 골치를 앓아 왔답니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 이후 실업자가 급증하며 그 숫자가 두 배로 늘어 전체 승객의 34% 수준이 되었답니다. 당국은 지난해 하반기에만 최소 1천만 달러의 손실을 본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잘산다는 나라에서도 급변하는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염치고 뭐고 돌볼 여유가 없게 되는가 봅니다.

 



근대화, 산업화라는 힘겹고 고달픈 시대를 겪고 난 오늘 우리는 세계에서 열 번째쯤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제 걱정스러운 건 물질의 가난이 아니라 예전보다 더욱 찌든 마음의 가난, 정신의 가난이라 하겠습니다. 친구가 보내준 짧은 동영상 한 편을 보면서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저게 바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실상이 아닐까? 주머니는 차고 머리는 빈 사람들의 세상이 되어간다는 느낌!’

동영상에서는 젊은 부부가 어린 아이를 데리고 음식점에 들어갑니다. 마침 카운터의 남자직원이 다른 손님 음식값을 계산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 아이가 카운터에 놓인 휴대폰을 들고 갑니다. 계산을 마친 직원이 부부에게 다가가 “아이가 우리 직원의 휴대폰을 가져간 것 같다”고 말하자 아이 엄마가 대뜸 “아니, 우리가 도둑이라는 거냐”고 반문합니다. 직원이 “아이들은 원래 호기심으로 그럴 수도 있지 않으냐?”고 말합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물으니 아이는 안 가져갔다고 대답합니다. 직원이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아이 엄마에게 직접 확인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아이 엄마가 잔뜩 화가 나서 “이 가게는 손님 대접을 이딴 식으로 해요? 아까도 융통성 없이 굴 때 그냥 넘어갔는데 어디서 이렇게 무식한 짓이야. 엉?” 하고 도리어 혼을 냅니다.

이때 아이 아빠가 나서서 점잖게 말립니다. “당신도 그만해. 원래 이런 데서 일하는 애들 못 배운 자식들이야. 집에서 잘 가르쳤으면 이런 데서 일 안 하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휴대폰 주인 여직원이 끼어들자 아이 아빠가 이렇게 호통칩니다. “아니, 우리가 고상해서 가만히 있었던 거지, 지금 뭣들 하는 짓이야?”

상황은 호기심이 지나쳤던 아이의 주머니에서 문제의 휴대폰이 나오고, 부부가 억지춘향격으로 사과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누군가 장난스레 만든 동영상이겠지요. 그러나 실제 우리 사회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을 콕 집어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진 자는 고상한 인격자, 못 가진 자는 비루한 비인격자.’ ‘갑은 무얼 해도 옳고, 을은 언제나 그르고.’ 대한항공의 ‘땅콩 회항’ 사건 때도 확인되었던,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그릇된 인식입니다. 지갑 속에 욕망으로 채운 돈, 그리고 머리와 가슴에 덕성으로 쌓은 교양은 전혀 별개의 것입니다. 

 

 



도시건 시골이건 하루가 멀다 하고 하늘을 찌를 듯 고층 아파트들이 늘어갑니다. 도로엔 외제 고급 승용차들이 즐비합니다. 명품 구매를 위한 백화점 앞 새벽 줄서기도 예삿일입니다. 잘살게 됐으니 그만큼 마음도 너그러워질 법하건만 정반대로 남을 배려하는 마음, 양보하는 마음은 갈수록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웃 간 인사는커녕 위아래층 소음 시비로 칼부림이 벌어집니다. 아차 하는 순간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고속도로에서 끼어들기 시비가 끊이질 않습니다. 책 한 권 안 읽어도 명품 백을 들고 다녀야 체면이 섭니다.

전례 없이 혐오스럽고 해괴한 사고와 범죄들이 속출합니다. 힘 있는 자, 가진 자일수록 편법, 탈법, 불법에 앞장서니 안 그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부터 야비하고 거칠기만 합니다. 심지어 나라를 이끌어가겠다는 사람들 입에서조차 궤변과 험한 욕설이 난무합니다. 때와 장소가 바뀔 때마다, 얼굴을 돌릴 때마다 다른 소리를 내는 게 오히려 임기응변으로 칭찬받는 세상입니다.

3월 9일, 앞으로 3주 후 대통령선거가 실시됩니다. 글쎄, 대통령이 바뀌고 정권이 바뀌면 좀 더 인간적인 세상이 될까요?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넘칠 만큼은 못 되어도 좀 더 정직하고, 염치를 아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따뜻하고 피가 통하는 세상,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잘 먹고 잘사는 것도 좋지만 품격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더 좋겠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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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2006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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