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소년의 짝사랑[한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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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소년의 짝사랑

2020.12.16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이 됐습니다. 1월부터 코로나19 창궐로 인해서 봄이 가는지, 여름이 오는지, 단풍이 드는지 정신없이 보낸 한 해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람들마다 12월을 보내는 심정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 해가 간다고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새로운 해가 온다고 합니다. 한 해가 간다고 생각하면 섭섭하지만, 새로운 해를 맞는다고 생각하면 희망이 생겨날 것입니다.

저는 세월이 가고 오는 것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가지는 편이 아닙니다. 가는 세월을 붙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오는 세월을 막을 수도 없다는 생각에 아직도 하루 8시간은 집필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명절에도 차례를 지내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을 쓸 정도니까, 거의 매일 글을 쓰고 있는 셈입니다. 매일 글을 쓰다 보니 과거를 회상하거나, 추억에 젖는 경우도 많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입니다.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서울에서 여학생이 전학을 왔습니다. 다른 여학생들과 다르게 박의 속살처럼 흰 피부에, 길게 땋은 머리카락, 검정고무신이 아닌 빨간색 운동화를 신은 김은숙은 단번에 모든 남학생들의 로망이 되었습니다.

김은숙은 저하고 같은 4학년이었는데 반은 달랐습니다. 그래서, 김은숙과 같은 반 남학생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릅니다. 그녀는 다른 여학생들처럼 복도를 뛰어다니며 장난을 치거나, 운동장에서 고무줄놀이나, 땅따먹기 같은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쉬는 시간에도 늘 혼자 앉아서 공부를 하거나, 동화책 같은 것을 읽었습니다.

저는 일부러 김은숙 얼굴을 보려고 괜히 복도를 서성거리기도 하고, 친구를 찾는 척 교실 안에 들어가 보기도 했습니다. 김은숙 옆을 지나갈 때는 얼굴이 빨갛게 물들면서 가슴이 두근두근했습니다. 어쩌다 그녀와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치기라도 하면 숨이 멎는 것 같아서 깜짝 놀란 얼굴로 시선을 돌리기 일쑤였습니다.

그 시절 학교에 갈 때는 동네에 있는 학생들이 모두 모여서 줄을 지어 등교를 했습니다. 1학년이 앞장서고, 키가 큰 6학년 형들이 뒤에서 지휘를 하는 식으로 등교를 하는 까닭에 집에서 나오면 학생들이 모이는 장소로 가야했습니다.

김은숙은 다른 동네에 살았습니다. 학교에 가려면 제가 사는 동네 앞을 지나쳐야 합니다. 저는 학교에 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려고 집에서 일부러 늦장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이른 아침에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길을 걸어가는 김은숙의 모습은 순정만화에 나오는 여자주인공보다 더 예뻤습니다.

사과 과수원을 하시는 고모님이 사과를 팔러 다니자고 저희 집에 오셨습니다. 친척 동생하고 둘이 사과를 가득 실은 리어카를 끌고 집을 나섰습니다. 사과는 돈을 받고 팔기보다는 나락이나 마늘 같은 것을 주로 받았습니다.

김은숙이 살고 있다는 동네에 들어갈 때는 그녀를 만나게 될 것 같아서 괜히 가슴이 떨렸습니다. 그때서야 느낀 것은 김은숙이 어느 집에 사는지, 형제는 어떻게 되는지, 부모님들은 무얼 하고 계신지 등 그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점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입니다. 또 누군가에게 물어 볼 용기도 나지 않았습니다.

김은숙은 공부도 잘했고, 분명 부잣집 딸이겠지만, 저는 키도 작았고, 머리도 잘사는 집 아이들처럼 상고머리가 아닌 빡빡 머리에 공부도 못했습니다. 유일하게 잘했던 점은 만화책을 누구보다 빨리 읽을 수 있다는 점 정도였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사는 곳은 길갓집이었습니다. 열린 삽짝문 안으로 안방에서 나와 옆방으로 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순간 김은숙에게 사과 몇 개를 주고 싶은 충동이 불처럼 일어났습니다. 고모님에게 말씀드리면 사과 몇 개 정도는 충분히 줄 수 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고모님은 사과를 사라고 골목마다 다니시며 외쳤지만 김은숙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아쉬움을 안고 그 동네를 떠나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웠습니다. 그녀가 사는 동네를 몇 번이나 뒤돌아봤지만 야속하게도 점점 멀어질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5학년을 건너뛰고 6학년이 됐습니다. 졸지에 동급생에서 선배가 됐지만 그녀를 향한 짝사랑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짝사랑이 비극으로 끝난 것은 5학년이 되던 해의 봄날이었습니다.

점심시간에 갑자기 뒤가 급해서 화장실로 뛰어갔습니다. 노크하는 것을 깜박 잊고 화장실 문을 여는 순간 6학년 형이 깜짝 놀란 얼굴로 저를 바라봤습니다. 대충 사과를 하고 옆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볼일을 보고 문을 밀었습니다. 누군가 밖에서 잠갔는지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점심시간이 5분 남았다는 예비종이 울렸습니다. 갑자기 사방이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습니다. 문은 아무리 밀어도 열리지 않아서 당황한 나머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화장실 안에서 목 놓아 울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여는 인기척이 들렸습니다. 얼른 나가보니 불행하게도 김은숙이 긴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많은 여학생 중에 하필 김은숙이었냐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황당하고 비통하다 못해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밖에서 문을 잠갔을 형이 눈앞에 있었다면 제가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대결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녀가 민망해할 저를 배려해서 끝까지 뒤를 돌아다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 후로 저는 김은숙이 있음직한 곳은 피해 다니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6학년 반이 있는 복도는 절대로 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그 동네 학생들이 줄지어 오는 광경이 보이면 골목에 숨어 버리기도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제 나이 40대 중반 무렵에 김은숙의 사촌오빠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동네에서 이장 일을 보고 있는 사촌오빠가 ‘마을자랑비’에 쓸 문구와 기념시를 써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넌지시 김은숙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사촌오빠는 김은숙의 부모는 그녀가 시골로 내려오던 해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김은숙도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부모가 있는 미국으로 갔다고 대답했습니다. 산골소년의 짝사랑하던 소녀가 미국에 살고 있다는 점에 놀라지 않았습니다. 짝사랑이 사랑으로 이루어졌다면, 그건 이미 짝사랑이 아니니까요.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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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한만수

1990년부터 전업으로 소설을 쓰고 있음.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실천문학 장편소설 “하루” 등단. 대하장편소설 “금강” 전 15권 외 150여권 출간. 시집 “백수블루스”외 5권 출간. 이무영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활”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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