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미싱은 누구 입을 꿰매려들까 [신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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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미싱은 누구 입을 꿰매려들까

2020.12.14

서울 정동길을 가다가 구(舊) 신아일보 별관(신아일보 역사관으로 공사 중) 빌딩을 둘러보았습니다. 내부로 들어가도 누구 하나 저지하지 않았습니다. 골조는 옛 모습인데 격실이 생겼고, 칸막이가 공간을 여러 개로 갈랐습니다. 지하실은 공무국이었는데 지형(紙型)에 녹인 납 물을 부어 연판과 활자를 만들 때 나는 독특한 냄새 대신 페인트 냄새가 가득했습니다. 어두컴컴함 조명 아래 활자를 뽑던 문선공들의 흔적조차도 없어졌습니다. 1층 편집국 자리는 사무실로 변했습니다.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신문을 찍어낸 날이 1980년 11월 25일이니 벌써 40년 전 일입니다. 같은 날 신군부에 의해 신아일보를 비롯해 서울경제 내외경제 등 중앙지와 지방지들이 대거 통폐합되었습니다. 이어 TBC TV와 동아방송 전일방송 등 방송사들도 송출을 중단했습니다. 자유 민주 국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힘으로 밀어붙인 강제 재편이었습니다.

15년 넘는 세월 동안 지령 4806호를 낸 신아일보의 역사만큼 건물의 역사도 흥미롭습니다. 공식 안내판에도 건물 준공에 관한 기록은 없습니다. 붉은 벽돌 2층 건물로 지어져 1930년대는 미국의 싱거 미싱(singer machine) 한국지사가 사용했고,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 회사를 추방했습니다. 그 후 해방 때까지 일본은 이 건물을 정보기관 사무실로 사용하며 우리 독립지사나 애국청년들을 잡아 고문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미 CIA 전신인 미국 전략 사무국(OSS)이 차지했습니다. 정보 관련 기관이 사용했다는 것을 뒷받침하듯 건물 지하는 거리에서 곧바로 진입이 가능합니다. 내부 구조는 막힌 ㄷ자형으로 도망가기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일종의 미로 같습니다.

건물 정면 좌우의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면 맨 처음 손틀 싱거 미싱이 보입니다. 싱거 미싱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1920년대 쯤으로 여겨집니다. 울산의 싱거 미싱 분점에서 여성들을 상대로 재봉 강의를 한다는 기사를 시작으로 전국을 돌면서 판촉 행사를 한다는 광고가 이어집니다.* 당시 미싱은 돈 많은 집 부인들만 가질 수 있었던 중요한 살림 목록이었습니다. 전당포에 미싱을 맡기고 돈을 빌렸다거나 미싱을 가지고 사기를 쳤다는 기사도 종종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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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일보 역사관에 전시된 싱거 미싱과 안내판

세월이 변하고 우리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미싱의 위상도 달라집니다. 싱거에 이어 1930년대 후반에는 “가격은 미제의 반값이고 성능은 더 우수하다”는 일본제 미싱(자노메 등) 광고가 국내 신문에 실립니다. 6・25 이후엔 미싱으로 가계를 꾸려간 집들이 많았습니다. 1960년대는 미싱을 활용하는 봉제 산업이 우리 무역의 중심이었고, 세계 주요 미싱 회사들은 우리나라에 미싱을 팔려고 각축을 벌였습니다. 1970년대에는 국산 미싱이 생산되며 기계산업의 한 분야로 자리 잡았습니다. 미싱은 이때까지만 해도 미싱 머리(은어로 말대가리)를 떼가는 도둑이 많았을 정도로 일반 가정에서는 귀한 존재였습니다. 한때는 혼수로도 각광받았었는데 세태의 변화에 따라 최근에는 가정에서 미싱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현재는 지그재그미싱 등 특수 작업용이 주로 팔릴 뿐입니다.

제 어머니는 바로 아래 동생인 이모와 평생 한 마을에서 살았습니다. 아랫마을 이모에게 가면 이모는 자주 손틀 싱거 미싱에 앉아 무엇인가 만들곤 했습니다. 오른손으로 미싱 바퀴를 돌리고, 왼손으로 천을 밀어 주면 바늘이 치마폭에 쌓여 있던 옷감을 자동으로 꿰맸습니다. 드르륵 드르륵 소리가 들리면 천이 이어지고 합쳐져 옷 모양을 갖춰갔습니다. 어린 마음에 호롱불 아래서 한 땀 한 땀 바늘로 꿰매 가시던 어머니보다 이모의 바느질 속도가 빨라 어머니께 심통을 부린 적도 있습니다.

제 일생의 첫 번째 사진 속에는 이종 사촌형과 이모가 만들어준 같은 모양의 조끼를 입고 나란히 서 있습니다. 2x2라고들 말하는 아주 작은 사진 속 네 살 다섯 살의 소년들은 잔뜩 폼을 잡았습니다.

미싱 이야기를 하며 김홍신 전 국회의원을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염라대왕은 죽어서 하늘에 온 사람을 심판할 때 생전에 거짓말한 횟수만큼 입을 바늘로 뜨는데 식언 횟수가 많은 김대중 대통령의 입은 공업용 미싱으로 박히게 될 것이라는 취지로 말했다가 명예훼손으로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최근 국회에서 여당이 공수처법을 시행도 되기 전에 개정했습니다. 여당은 또 서울과 부산 시장 보궐선거에 후보를 낼 수 있도록 당헌을 바꾸었습니다. 대통령은 "때로는 광화문 광장에서 대토론회를 개최하겠습니다"고 약속했습니다. 법무부 장관은 장편소설을 쓰고 있다며 국회의원 질문을 넘겼습니다. 방역 책임자가 Covid19는 “이번이 고비”라고 초기부터 수차례 이야기해 왔는데 하루 확진자가 1,000명을 넘었습니다. 백신은 필요한 만큼 충분한 양이 확보가 되었나요. 누가 주도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우리 국민(북한 탈주 청년) 두 명을 범죄자라며 북한으로 넘겼습니다. 당국은 해양수산부 공무원이 월북했다고 발표했습니다. 현직일 때 수사를 받던 전 법무부 장관은 "무슨 낯으로 장관직을 유지하면서 수사를 받느냐"고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경제 관련 장관들은 기회만 있으면 집값과 전셋값이 안정되었다고 말합니다.

거짓말을 한 사람의 입을 찾아 꿰매도록 프로그램이 입력된 AI(인공지능) 미싱이 있다고 칩시다. 위의 말을 한 누구의 입을 꿰매려 달려들까요? 상상만 해봅니다.

*조선일보 192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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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신현덕

서울대학교, 서독 Georg-August-Universitaet,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 몽골 국립아카데미에서 수업. 몽골에서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 방어. 국민일보 국제문제대기자, 한국산업기술대학교 교수, 경인방송 사장 역임. 현재는 국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서독은 독일보다 더 크다, 아내를 빌려 주는 나라, 몽골 풍속기, 몽골, 가장 간편한 글쓰기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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