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 보이기 놀이 [정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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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 보이기 놀이

2020.12.08

“연말을 앞두고 내가 최대한 늙어 보일 만한 사실을 말해보자”라는 놀이가 SNS에서 유행입니다. 시간 순서대로 쌓인 기억 중에서 자신이 보이고 싶은 제일 아래의 기억을 꺼내서 사람들에게 “나 이런 시절을 보냈소”라며 펼쳐놓는 놀이입니다. 여러 사람이 참여해 서로 기억을 주고받기도 하고, 그냥 자신의 옛 시절을 나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적인 기억이지만 그 시대의 삶과 추억을 불러내는 것들이어서 공적인 기억이라고 해도 되지 않나 싶습니다. 몇 가지 옮겨보겠습니다.

“창경원 낙타 앞에서 찍은 사진이 있음.” “흑백TV였는데 그나마도 없는 집이 많았음.” “집 안에 화장실이 없었음. 게다가 푸세식이었음. 학교 화장실도 그랬음.”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것을 기뻐하는 농촌 이야기가 교과서에 실려 있었음.” “만원버스에 승객들을 꾹꾹 밀어 넣은 후 ‘오라이~~~’라고 외치던 버스 안내양이 있었음.” “우유를 병에 넣어 배달했음.” “야간통행금지가 있었음” “학교에서 기생충 검사한다며 채변봉투를 나눠줬음.” “구충제로 산토닌을 먹었음” “원기소를 서로 먹으려고 동생과 싸웠음” “전차를 타봤음.” “동대문 옆에서 출발하는 기동차를 타고 뚝섬에 간 적 있음.” “삼발이 용달차를 불러 이사했음.” “한국에서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를 타봄.”

‘원시 디지털 시대’의 추억을 나이 듦의 증거로 꺼낸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 거지요. “학교 앞 문방구에서 갤로그 게임했음.” “컴퓨터 게임이 카세트테이프에 저장돼 있었음.” “8인치 플로피 디스크를 사용했음.” “하이텔로 통신을 해봄.” “첫 통신사는 012 나래텔이었음.” “디스켓이란 게 있었음.” “MS-DOS로 문서작업을 했음.”

이 놀이에 정성을 들이는 분들은 사진도 찾아서 올려놓습니다. 우유병, 채변봉투, 삼발이 용달차, 플로피 디스켓, 카세트레코더와 테이프 … 등등입니다. 사진 중에서는 짐자전거 사진을 오래 들여다봤습니다. 철근을 구부려 만든 짐받이를 뒷바퀴 위에 용접한 육중한 자전거인데, ‘국민학교’ 5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옆 동네 청과시장에서 산 사과 낙과 한 접(100개)을 커다란 대바구니에 싣고 집에 끌고 온 기억이 났습니다. 집에 다 오자 아버지께서 “다 컸구나, 사과 한 접을 싣고 왔으니 말이다”라며 대견해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나도 ‘최대한 늙어 보일 만한 기억’이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이 놀이에 뛰어들까 했지만 참기로 했습니다. “국민학교 입학한 해가 단기 4292년이었음.” “교과서 맨 뒤 페이지에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로 시작되는 ‘우리의 맹세’가 있었음.” 같은 걸 써놓고 싶었지만 “진짜 늙은이가 이 놀이에 끼어들면, 진짜 경찰이 애들 경찰놀이 하는 데 끼어드는 거나 같다”라는 말을 한 분이 있어서 참은 거지요. 또 내가 써놓은 걸 나보다 연상인 분들이 읽고는 “늙어 보이기 놀이하는 것들을 보니 모두 나보다 어린 친구들임을 알게 되었다”고 써놓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놀이, 변형 ‘꼰대질’ 같기도 합니다. “나 때는 말이야”라고 말을 꺼냈다가는 젊은이들에게서 외면당하고, “Latte is horse”라는 비웃음까지 사게 되는 세태에서 늙어가는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모여 “나 때는 말이야”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올해 다시 이 놀이가 유행인 듯하다. 연말이 왔고, 나이와 지나간 과거가 생각나는 계절인가 보다”라는 말로 이 놀이에 끼어든 분이 있더군요. ‘늙어 보이기 놀이’가 여러 해 전에도 유행했다는 건데, 올해 다시 유행을 타게 된 건 아무래도 심각해진 사회적 불안감, 누적된 정치적 스트레스 같은 게 그 이유일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코로나19의 창궐만으로도 심신 모두 견디기 힘들게 된 국민을 안심시키고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채워줘야 할 정치가, 정치인들이 오히려 국민을 전에 없던 불안에 빠트리고 나라 전체에 절망감까지 안겨주고 있기 때문에 삼발이 용달차로 이사를 하고, 흑백TV로 ‘아씨’나 ‘여로’ 같은 연속극을 보던 예전이 지금보다 오히려 더 좋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꼰대들을, 아재들을, 우리들을 이 놀이에 은연히 밀어 넣는 게 아니냐는 겁니다.

동떨어진 이야기일지 모르겠습니다만, ‘경국지색(傾國之色)’을 ‘경국지추(傾國之醜)’라고 바꿔서 써놓으신 분이 있더군요. 아름다운 여인 하나가 (임금을 미혹에 빠트려 결국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 경국지색의 뜻이라면, 미운 여자 하나가 나라를 망하게 하고 있는 게 경국지추라는 겁니다. 검찰개혁을 한다며 1년 가까이 나라를 온통 불안에 빠트려온 법무부 장관 추미애를 비꼬는 것이 분명한데, 이런 것들도 ‘늙어 보이기’ 놀이를 다시 유행시키는 배경일 거라는 게 내 생각입니다. 아무려나, 내년에는 이 놀이가 유행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도 함께 절멸되었으면 좋겠고요. 아울러 "내년 이맘때는 연말을 맞아 내가 최대한 젊어 보이는 사실을 말해보자"라는 놀이가 유행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젊음은 발전이며 희망이니까요.

# 사진 출처 : 인터넷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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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정숭호

1978년 한국일보 입사, 사회부 경제부 기자와 여러 부서의 부장, 부국장을 지냈다.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뉴시스 논설고문, 신문윤리위원회 전문위원 등 역임. 매주 목요일 이투데이에 '금주의 키워드' 집필 중. 저서: '목사가 미웠다'(2003년), '트루먼, 진실한 대통령 진정한 리더십'(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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