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것들의 머무름 [임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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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것들의 머무름

2020.11.06

2020년은 결국 이렇게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1월에 새해를 맞았을 때만 해도 금년이 이런 해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나태주는 시 ‘3월’에서 “어차피 어차피/3월은 오는구나/오고야 마는구나”라고 했는데, 봄을 맞는 그 기다림과 환희와 달리 연말엔 ‘2020년은 어차피 어차피 이렇게 가는구나’ 하는 탄식을 저절로 하게 됩니다.

이 한 해 동안 우리는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생활했던 일상의 모든 것이 그토록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이었음을 새로 알게 됐습니다. 우리는 겨우 살아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걸리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고 12월은 아직도 20여 일이 더 남았지만, 그래도 연말이니 예년처럼 한 해를 정리하면서 매듭 하나를 맺고 가고 싶어집니다.

가을 석 달 동안 교보빌딩의 광화문 글판에는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라는 글귀(시인과 촌장의 노래 ‘풍경’)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렇게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는 안간힘을 쓰며 살고 있습니다. 인간은 고통과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되뇌며 살아왔는데, 지나가야 할 것들이 그대로 머물러 남아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지나가는 것과 머무르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머무르는 것에는 이끼가 끼고 녹이 슬게 되며 생명이 있든 없든 모든 게 다 썩게 됩니다. 그래서 아일랜드 시인 W B 예이츠(1865~1939)는 “말 탄 자여, 지나가라(Horseman, pass by!)”고 했는지 모릅니다. 이 말은 그의 묘비명이기도 합니다. “삶과 죽음에 차가운 시선을 보내라. 말 탄 자(길손)여, (그냥) 지나가라!(Cast a cold eye on life, on death. Horseman, pass by!)”

W B 예이츠의 묘비.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올해 이 세상을 지나갔습니다.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주 베르가모의 ‘레코 디 베르가모’라는 신문은 코로나19로 사망자가 급증하자 3월 14일자에 무려 11개 면의 부고면을 발행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5월 24일자 1면에 미국 내 코로나19 사망자의 1%에 해당하는 1,000명의 부고를 실었습니다. 2020년은 죽음이 일상화하다 못해 처리 곤란한 사회문제가 된 해입니다.

인간은 원래 머물러 있고 싶어 하는 존재입니다. 떠나더라도 자신의 마지막이 의미 있고 장엄하며 아름답기를 바랍니다. 파우스트가 어느 순간을 향해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Verweile doch, du bist so schön!)"라고 말한 것은 삶의 완성이자 이승을 떠나는 작별행위입니다. 파우스트는 ”내가 세상에 남겨 놓은 흔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은 가더라도 흔적이 남기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교사였던 한 여성은 11월의 마지막 날, 자신의 카카오스토리에 과거 동료 4명도 참여하는 그림 전시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전시회가 끝나지 않는 한 가을도 끝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종교학자는 죽고 난 뒤 유물이든 업적이든 기억이든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다고 말하더군요. 참 오묘하게도 머무르는 것은 죽거나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留(유)는 머무를 류(유) 자이지만 흐르다, 이동하다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息(식)은 쓰임새가 무척 많은데, 호흡 탄식 번식 생장에 더해 휴식 휴지 소멸의 의미까지 갖춘 글자입니다. 處(처)는 거주하다 살다 머무르다라는 뜻 외에 정지하다, 물러가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처서(處暑)는 더위가 물러가는 절기입니다. 독일어의 bleiben은 ‘머무르다, 남다’이지만, ‘auf dem Schlachtfeld bleiben(직역하면 전쟁터에 머무르다)’은 전사하다라는 뜻입니다.

부고로 가득 찬 뉴욕타임스 1면.

슈베르트의 ‘백조의 노래’ 중 제5곡 ‘Aufenthalt(안식처 또는 나의 집)’는 처절하고 비통한 노래입니다. “파도치는 흐름, 술렁거리는 숲, 우뚝 솟은 바위, 그것이 나의 집/눈물은 밀려오는 파도처럼 끝없이 흐르고/내 마음은 높은 나뭇가지 흔들리듯 끊임없이 고동친다./그리고 내 고통은 태고부터 우뚝 솟은 바위처럼 영원히 머무를 것이다.” 내 고통이 영원히 머무른다는 “Bleibet mein Schmerz.”인데, 슈베르트는 이 대목에서 Bleibet를 반복해서 부르게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오래전부터 이 부분을 “Bleib Bleib, mein Schmerz”(잠잠하라, 잠잠하라 나의 고통이여)라고 명령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말도 안 되는 왜곡이며 앞뒤가 맞지 않지만 나는 지금도 이렇게 생각하려 합니다.

잠잠하고 고요한 것은 원래 우리를 둘러싼 사물들의 질서입니다. 사물은 말을 하지 않는데, 인간의 필요에 의해 인간에게 봉사하도록 만든 것에서 이제는 인간이 거꾸로 배우게 됩니다. 지난 8월 86세로 조용히 세상을 떠난 미국 시인 팻 슈나이더(Pat Schneider)의 ‘평범한 사물들의 인내심(Patience of Ordinary Things)'을 다시 읽어봅니다.

그것은 일종의 사랑이야. 그렇지 않을까?
찻잔이 차를 담고 있는 일
의자가 튼튼하고 견고하게 서 있는 일
바닥이 신발 바닥을
혹은 발가락을 받아들이는 일
발바닥이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아는 일
나는 평범한 사물들의 인내심에 대해 생각한다.
옷들이 공손하게 옷장 안에서 기다리는 일
비누가 접시 위에서 조용히 말라가는 일
수건이 등의 피부에서 물기를 빨아들이는 일
계단의 사랑스러운 반복
그리고 창문보다 너그러운 것이 어디 있는가?

미국 시인 팻 슈나이더(1934~2020).

잠잠하고 너그러운 것들의 미덕도 2020년의 이 어려움이 아니면 모르고 지나쳤을 수 있습니다. 소설가 박완서(1931~2011)는 아들과 남편을 같은 해에 각각 잃고 하늘을 원망하며 살았던 절망의 세월을 어떻게 이겨냈느냐는 질문에 대해 “이긴 게 아니라 견딘 것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그렇게 견디며 잠잠하고 너그럽게, 고요한 생각 속에서 2020년을 보내고 새해를 맞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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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임철순(任喆淳)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역임. 현재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등 수상. 저서 ‘노래도 늙는구나’, ‘효자손으로도 때리지 말라’, ‘손들지 않는 기자들’, ‘내가 지키는 글쓰기 원칙’(공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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