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칼럼니스트의 고별 독백 [허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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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칼럼니스트의 고별 독백

2020.11.27

얼마 전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로저 코헨(Roger Cohen)이 그 신문사의 파리 지사장으로 부임하게 되어 이별을 고하는 칼럼에 다음과 같은 부제를 달았습니다. ‘칼럼니스트로서 12년 간 나는 불가능한 일을 이루기 위해 진심을 다해 힘썼다.’ (For 12 years as a columnist I wore my “heart after the unattainable”). 노골적으로 속내를 보이는 것을 마뜩지 않게 여기는 시각으로 보면 피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다는 서양속담처럼 바라는 바가 강하면 감추기 어려운 일이지요.

그의 칼럼은 동유럽의 큰 나라였던 유고슬라비아가 소련을 필두로 했던 공산권 붕괴와 함께 해체되며 발생한 1992년 보스니아 내전 취재담으로 시작합니다. 성숙한 문화와 갈등 해결 전통을 자랑하는 유럽의 한복판에서, 20세기 말에 무슬림과 그리스 정교도 간 발발한 이 내전은 인종청소로 이어지며 상당히 추악하고 잔인하게 전개되었습니다.

“4반세기 전 내가 젊은이였을 때 보스니아 전쟁을 취재하며 탔던 이 신문사의 방탄 랜드로버 차에 올랐다. 평소에도 불안정한 차는 가끔 귀신 씌운 듯 떨었다. 셋째 아이의 출산을 보기 위해 사라예보에서 파리로 향하는 길이었다. 공항은 세르비아군의 포격 때문에 폐쇄되어 다른 방법이 없었다.”

“세르비아 포들의 사거리를 벗어나는 이그만山을 넘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 거리에서 가까이 터진 포탄의 충격에 자빠졌었던, 숨 막히는 사라예보를 벗어나 드디어 집으로 가는 길인 것이다.“

그렇게 안도하던 순간 갑자기 차의 핸들이 고장을 일으켜 통제 불능이 된 차가 둑 아래로 굴러떨어집니다. 비상용 도끼로 방탄유리를 깨고 탈출한 후 취재 중 변을 당한 동료들과 같은 운명이 될 뻔한 경험의 의미를 곱씹습니다.

“만약 내가 이 전쟁에서 무사히 돌아간다면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미친 민족우선국가주의(nationalism)가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 사람들은 전설에 우쭐해하고, 열심히 장벽을 쌓게 하고, 사라예보의 동서 교차로 길을 경계 삼아 순혈 세르비아인 구역을 만들자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 결국 처참히 잔해에 묻힌 십만 명의 사망자로 대미를 장식한다. 관용을 짓밟고, 문명을 파괴하고, 독재자에게 힘을 실어주고, 자유를 집어삼킨다.”

“운이 좋아 보게 된 커가는 네 명의 아이들에게 세상의 훌륭한 운동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정의를 추구하는 것에 대해, 대법관 올리버 웬들 홈스가 말한 “헤로이즘의 쓴 잔(the bitter cup of heroism)”, 그리고 “성취할 수 없는 일을 이루기 위해 진심을 담아 노력하라는” 그의 충고에 대해서.“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군의 포격에 두 다리를 잃은 혼혈 세르비아인 남자가 내게 말하기를 방구석에 앉아만 있을지라도 아이에게는 아버지가 필요하다. 사는 것은 고생이나 끝까지 희망이 있기 때문에 살아야 한다. 나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나오는 헨리 5세의 투혼을 높이 산다. ”(그가 프랑스 왕의 사자에게 말했다. 프랑스 군과의 계속된 전투로 쇠진해진) 우리가 싸움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나, 그렇다고 싸움을 피하지도 않을 것이다.”

“독자 여러분 이것이 내가 뉴욕타임스에 쓰는 마지막 칼럼이자 작별인사이다. 나는 자유, 기본적 품위(decency), 다양성, 열린사회를 위한 이견의 중요성과 같이 내가 믿는 가치들을 옹호하기 위해 힘썼다. 획일적 생각은 생각의 죽음을 뜻한다. 이는 지옥으로 가는 길을 마련하는 것이다.”

(중략)

“지금 떠나는 것이 쉽지 않다. 나는 보스니아의 교훈을 ‘미국 우선’을 외치는 도널드 트럼프의 민족우선국가주의에 적용하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아직도 모든 유권자의 표가 유의미하고, 어느 州도 분리 독립을 시도하지 않고 있고, 총기가 범람하지만 무력대치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이 나라 미국이 트럼프 악몽에서 깨어나는 것 같다. 하지만 아직 미국은 그의 광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선거에 패배한 대통령이 진실과 법치와 민주주의 제도의 근간을 공격하는 것을 격퇴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중요한 과제이다.”

“미국의 신념이 다양한 처지의 수많은 사람들을 해방시킨 것처럼, 영국 유태인인 나를 해방시켰다. ...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시민들이 참여해야만 가능하다. 열린 미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트럼프의 장벽과 퇴보와 분열에 맞서기 위해 쇄신하고 단합하는 것은 21세기에 전제(專制)가 세계 각지에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필수적이다. 거짓 위에 독재가 군림한다.”

그의 부모는 2차 세계대전 때 극에 달한 유태인 박해를 피해 리투아니아에서 남아프리카로 이주한 피란민이었고, 본인도 남아프리카의 요하네스버그, 런던, 유럽 각지, 그리고 미국에서 살았습니다. 20세기 전반 유럽 대륙에서 6백만 명의 희생자를 낳은 나치의 인종말살(genocide)을 피해 떠돌이로 살아야했던 가족사가 그의 세계관에 크게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무는 뿌리가 있고, 유태인에게는 다리가 있다. 쫓기며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새로운 둥지는 이전 둥지의 상실을 뜻한다. 그 짐은 자살 충동에 시달렸던 나의 모친의 경우처럼 심각할 수 있다.”

“... 보스니아는 나의 (엄격한 인종차별제도 하의)남아프리카 경험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미국인들이 새삼스럽게 경험하는 것처럼 인종차별은 민족우선국가주의의 사촌이다. 두 가지 모두 ‘다른’ 사람들을 박해하거나 희생양으로 삼는다. 키플링에 따르면 ‘우리처럼 좋은 사람들은 모두 ’우리(We)’이고, 나머지는 ‘남(They)’이다.”

“나는 이게 잠시 동안의 헤어짐의 인사(au revoir, not adieu)이길 바란다. ... 흔히 여정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멀리서 불빛이 깜빡이는 목적지도 중요하다. 그 약속의 땅은 인간들이 자유롭게 존중받으며 살고자 하는 바람이 영원히 보장되는 곳이다.”

마지막으로 공감이 가는 한 독자의 댓글을 소개합니다.

“로저 코헨은 중생들보다 더 뚜렷이 듣고, 꿰뚫어 보는 능력을 가진 작가의 한 명이다. 다사다난한 세상사를 사람에 대한 존중이 배어있는 어조로 설명하고, 세상을 직시하는 증인 역할을 자처하고, 깨어 있는 도덕적 의식에서 나오는 의무감으로 만약 우리가 우리들 중 가장 약한 이들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세상이 얼마나 나아질 수 있을까 하는 논의를 마다하지 않았던 그의 빈자리가 아쉬울 것이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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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허찬국

1989년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후 미국 연지준과 국내 민간경제연구소에서 각각 십년 넘게 근무했고, 2010년부터 2019년 초까지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로 재직. 다양한 국내외 경제 현상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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